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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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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1>

공부 1

***‘용서’보다 ‘인생무상’ 안겨준 박정희의 죽음**

“그날. 시월 이십 며칠이던가. 그게 바로 10·26 직후였다. 구치소내 방송에서 낯선 소리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고 박대통령께서….’박정희가 죽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때였다. 내 속 저 밑바닥에서 꼭 허공으로 애드벌룬 떠오르듯 그렇게 말 세 마디가 줄지어 떠오른 것이었다.

‘인생무상’‘안녕히 가십시오’‘나도 곧 뒤따라 가리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용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고 나고 간에 언젠가는 모두 떠나야 한다는 그 ‘무상함’을 깨달은 것이다.”

***공부 1**

재판은 그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유죄판결이었으니까.

그러나 재판의 정치적 결과는 나의 승리로 돌아왔다.

그 과정 전체가 나의 사상적 모색 과정을 그대로 드러냈으니까.

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진정한 내 공부의 시작이었다.

동서양의 수많은 책들을 읽었다.

그 길고 긴 시간, 나는 그저 책밖에 읽은 게 없는 듯싶다. 지금의 나의 지식은 거의 그 무렵의 수많은 독서의 결과다. 그러나 일반적인 독서 외에 내가 참으로 힘을 집중해 ‘공부’(工夫)한 것은 네 가지였으니 첫째가 생태학, 둘째가 선불교(仙佛敎), 셋째가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사상, 넷째가 동학(東學)이었다.

첫째의 생태학은 맨 먼저 일반적인 환경생태학(環境生態學)으로 들어가 공공경제학(公共經濟學)을 거쳐 드볼과 쎄션의 심층생태학(深層生態學)의 소개서로, 거기서 다시 루돌프 바로와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학(社會生態學) 입문 서적으로 나아갔다. 생태사회주의니 생태마르크스주의니 기타 이것저것 독일 녹색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전망과 소개를 접하게 됐고 녹색당과 페트라 캘리 등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대충의 스케치들일 뿐이었으니 체계적이고 정확한 지식은 훗날 병사(病舍)로 옮긴 뒤던가 아니면 출옥후 구해 읽은 것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그 무렵의 사유와 상상력을 급전환시키는 데 그 스케치들은 결정적 촉매 노릇을 하였다. 생태학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의 경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낡아빠진 역학이나 사회구성체주의 따위 가지고는 살아 생동하는 생성적 공간과 시간인식을 할 수 없게 됐다. 녹색운동은 새로운 변혁운동의 시발점이었고 생태학은 이 운동의 지침서였다.
그러나 생태학만으로 세계와 삶의 진화를 이해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도 복잡심오한 것이었으니, 나는 그 생태학 소개에 촉발되어 도리어 선(禪)과 불교에 관한 깊은 지식 및 지혜를 갈구하게 되었다. 생태학, 특히 사회생태학이 새로운 사회변혁론의 근거라면 선불교야말로 인간의 영적(靈的) 깨달음과 영성적(靈性的) 소통(疏通)의 철학이었다. 나는 ‘금강경’(金剛經)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외우게 되었고, 고승들의 게송(偈頌)과 법어(法語) 200수(首) 가량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

마음에 거침없는 푸른 하늘이, 가없는 우주의 바람이, 파도치는 드넓은 바다가 문득문득 나타나기 시작했고 거꾸로 뭇 생명의 생태학적 질병과 오염과 파괴, 죽임에 대한 연민과 자비가 어려운 것이 아닌 아주 자연스러운 귀결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것, 텅 빌 정도의 영적 깊이와 사회생태학적 파괴의 극복이나 생명평화의 새 사회 창조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 어떤 확실한 과학적 근거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 여기에 나의 답답함이 있었으니 또한 진정으로 새로운 공부가 필요하게 되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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