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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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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0>

재판 소묘

또한 재판은 그동안 못 뵈었던 여러 벗들과 가족들을 접견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법정(法庭)은 그때 나의 한 소우주였다.

진검승부의 절벽 위였지만, 나는 이미 내 목을 떼어 감방에 두고 왔으므로 별로 두려움은 없었다.

불쌍한 것은 아내.

속을 태워 얼굴에 기미와 주근깨가 잔뜩 끼어 있었고, 첫날에는 나를 태운 호송차가 법정에 붙어 있는 '비둘기장'을 벗어날 때 눈물을 흘리는데 그녀가 예전에 나의 우는 모습을 비유하던 피카소의 '우는 여인'처럼 눈물방울이 얼굴 바깥의 사방 팔방으로 튀어나갔다.

아기의 얼굴은 샛노오랬는데, 나중에 들으니 재판이 열릴 때만 되면 아버지 보러 간다고 긴장해서 잠을 못 자곤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장모님의 얼굴도 수척했다. 또 원주의 벗들 그리고 멀리 사는 근태(根泰)숙부의 얼굴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중에도 감사한 것은 재판마다 방청해서 꼬박꼬박 일어나 내게 절을 하던 화가 방혜자(方惠子) 선배의 고마움이다. 방선배는 옛날 미술학교 데모 때의 동지이기도 했고, 그때의 별명이 '잔 다르크'였는데 내가 결혼전 사람을 만나러 다니다 지치고 배고프고 돈 떨어지면 동숭동 문리대 뒤에 있던 선배 댁에 가서 신세를 지곤 했던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검사와 판사도 하기 싫은 악역을 억지로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다만 변호사들, 그때는 박세경(朴世經)·이돈명(李敦明)·조준희(趙準熙)·이세중(李世中)·홍성우(洪性宇)·황인철(黃仁喆) 씨 등 기라성 같은 변호사들이 주루루 포진해 있었고 날카롭고 여유만만한 질문과 당당한 법정발언들로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딱한 것은 증인들이었다.

누구보다 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중에 있어 머리를 박박 깎은 손정박 형이 중앙정보부와 검찰의 협박과 압력에 못 이겨 나를 공산주의자로 인정하는 울적한 대답을 했을 때 내가 증인심문에서 한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물론이지만 증인도 역시 공산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슨 혁명적 공산주의자가 그렇게도 허약한가. 역시 증인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혁명적 공산주의자가 되려고 했던 '사상의 유충(幼蟲)'에 불과했다. 나 역시 유충이다. 다만 나는 증인보다 좀 더 복잡하다. 목표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의 어떤 부분을 긍정하는 것뿐이다. 마음과 몸 다같이 건강하기를 바란다."

또 한 증인은 신상초(申相楚) 씨였다. 그는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내 수첩을 감식하여 내가 철저한 공산주의자라고 증언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이도 역시 '오적'(五賊) '비어'(蜚語) 등의 사건 때는 나를 만나 "어느 누구라도 당신을 반공법으로 몰려고 하면 내가 스스로 나서서 변호하겠다"고 기염을 토하던 인물이었다.

내가 수첩의 증거물 부분에서 공산주의적인 것과 반공산주의적인 것을 둘 다 지적하고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변증법이냐 아니냐를 물었을 때 명쾌한 대답을 못 하고 땀만 자꾸 씻었다.

내가 대신 대답했다.

"서양에서는 그것을 '옥시모론', 즉 모순어법이라 하고, 동양에서는 그것을 음양법(陰陽法)이라 한다. 음양법은 변증법인가."

확실하지는 않다. 이게 그때의 질문인지, 다른 날 다른 사람과의 이야기인지, 하여튼 그러나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여기에도 그이는 대답을 못 했던 것 같다.

하긴 그날이 덥기는 더웠다. 그러나 그이는 땀을 너무 많이 흘리고 있었다. 술 때문이다.

마지막 증인이 소설가 김승옥(金承鈺) 형이다.

<사진>

그이는 나를 공산주의자로 보는 것은 나를 모르기 때문인데 4월혁명에서부터 보아야 나를 똑바로 알게 된다고 하면서 문리대 벤치 시절의 우리의 그 숱한 낭만적 사건들을 말했다.

나는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우는 웃음'이었으니 '우음'이었다. 너무도 신선해서였다. 마치 봄날의 향기 짙은 라일락이나 여름날의 푸르른 마로니에 밑에 서 있는 듯했으니….

문학평론가 김병익(金炳翼) 선배와 소설가 선우 휘(鮮于輝) 선생의 감정서 또한 내게는 고마운 지원이었다.

재판은 '7년 징역형' 선고로 1년만에 끝났다. 선고 직전의 3시간에 걸친 최후진술에서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단 한 마디뿐이다.

"나를 구박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 그 용서의 표시로 이 성탄 주간에 흰 함박눈을 펑펑 쏟아내려 달라"였다.

나머지는 별로 기억에도 없지만 모두 그렇고 그런 소리들이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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