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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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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9>

성경

성경!

그 '이스라엘 무협지'가 허가되어 들어오던 날 나는 재판이 곧 열리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읽고 또 읽었다. 강호의 영웅 소식인 듯, 소림사(少林寺)의 무슨 연단 하듯, 배고픈 놈이 밥 찾듯, 목마른 놈이 물 찾듯 그렇게 맛있게 맛있게 성경을 먹고 또 먹었다. 불과 몇 달만에 세 번 네 번씩 읽어 중요 부분은 거의 외우다시피 되었다.

하기사 읽을 거라고는 달랑 그것뿐이었으니까.

그 결과 이제까지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 예수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신구약(新舊約) 자체가 온통 채색화가 되었으며 현묘한 리듬으로 가득 찬 서정 서사시가 되었으니 아마도 인류의 문학사상 최고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나는 또 머리 속으로 김지하식 다이제스트 성경을 구성하였으니 재판정에서 검사와 변호사와 판사, 그리고 증인들이 할 법한 말들을 먼저 내 스스로 각각 대여섯 갈래로 예상하고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또한 각각 대여섯 갈래로 요리조리 마련했으니 그것이 모두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요, 특히 예언자들의 중요한 예언들은 몇 장 몇 절까지 달달 외워 척척 인용할 정도까지 되었다.

어떤 부분들은 그 신학적 해석까지 내멋대로 해댔으니 성경도 성경이려니와 아무 것도 곁에 없는 감옥의 공(空), 무(無), 허(虛)야말로 그 결과야 어떻든 무서운 창조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 읽었던 공의회 문헌이나 교황 회칙, 내가 읽은 몇 권 안 되는 신학책들이 그 의미가 환하게 짐작되고 그 신비가 투명하게는 아닐지라도 대충은 이해되는 때도 있었다.

더욱이, 물론 초보적이기는 하나 어떤 부분들은 동양적인 지혜와의 융합이 가능하다는 깨달음 비슷한 것도 때로는 맛보기까지 하였다. 모두가 한마디로 하면 이른바 '활동하는 무(無)'의 창조력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에 대한 내 기억은 한 판 연구발표였다. 성경과 문헌, 회칙의 인용으로 시작해서 내 나름의 래디컬적인 제멋대로의 판단과 해석으로 끝나곤 했으니 이 세상의 창조 중 죽지 않기 위해, 막판에 몰려 오직 살고자 행하는 필사의 창조 이상으로 옹통진 것은 없지 않나 싶었다.

하기사 재판 전에 나의 두 권의 옥중수첩을 가지고도 이미 새로운 민중신학을 구상한 서남동(徐南同) 선생의 작업도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경우의 창조적 배경 역시 민중세력 전체의 죽기살기 판갈이싸움에 있었던 것 같다.

재판의 성격은 간단했다.

저쪽은 나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는 법적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고, 내쪽은 그 법적 전투에서는 져도 박정권을 세계에 고발하는 전쟁에서는 이기는 것이었다.

재판은 꼭 1년을 끌었다.

판사는 결국 유죄를 선고했으나 선고 직후 법복을 벗어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나의 무죄를 입증했다.

그만하면 된 것이다. 박정권의 10월유신 밑에서, 더구나 반공법 아래서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었으랴?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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