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6>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6>

문세광의 방

구치소로 이송되어 며칠째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잠을 잤다.

꿈에 박정희를 만났다.

그는 배를 타고 멀리 도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자가 칼을 던져 돛줄을 끊어 버렸다. 배는 돛들이 제멋대로 놀며 뱅뱅뱅 돌다 드디어 구름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가까스로 깨어나 가만히 살펴보니 전에 문세광이 들어 있던 방이다. 내가 민청사건때 들어와 두번째 있던 사방(舍房)이 바로 문세광이 있던 사방의 맞은편에 있어서 그 방을 특수장치로 리모델링하는 것을 봤으니….

<사진>

감방문 바로 위에는 텔레비전 모니터가 달려 있고 문 바로 옆에는 흰 벽이 깎이고, 그 안에 아마도 녹음기로 보이는 무슨 시커먼 기계가 하나 들어앉아 있었다. 그 문세광의 방은 서대문감옥에서도 가장 중요한 오지(奧地)여서 일본 적군파(赤軍派)로부터 문세광이나 나 같은 자를 보호하기에 안성맞춤이고 요해처(要害處)였다.

그 방에 그 뒤 심심하면 문세광이가 와서 놀다 갔다. 하는 얘기가 항용 똑같아서 내가 졸기 시작하자 그 뒤부터는 오지 않았는데 맨날 하는 말이 자기는 박정희 자작극(自作劇)의 괴뢰도 아니고 김일성(金日成) 음모극의 괴뢰도 아니며 그저 한 사람의 재일교포로서 10월유신이 나자 민족적 울분 때문에 박정희를 없애겠다고 다짐한 사람이라고, 나도 아는 얘기를 한이 맺혀서 한이 맺혀 자꾸만 자꾸만 반복해 드디어는 내가 껌벅껌벅 졸게 된 것이다.

문세광이가 오지 않자 한번은 일본 적군파에 속하는 키가 후리후리한 검은 옷 검은 복면의 '닌자'(忍者) 두 명이 창살 사이로 슬며시 들어오더니 나를 프랑스로 데려가겠다고 딱딱 끊어서 말을 했다.
나는 그들에게 나라는 사람은 본디부터 조국을 워낙 사랑하므로 그렇게는 할 수 없으니 당장 돌아가 달라고 살살 달랬다. 밤새 국제주의적 의무사항을 으르딱딱 웅변하더니 푸른 새벽이 오자 갑자기 흰 연기로 변해 자취를 감췄다.

또 그 다음에는 어느날 한밤중에 노 젓는 소리가 내내 들려와 창살 밖으로 내다봤더니 보물섬에 나오는 외다리 선장 실바가 조각배에 술과 담배를 잔뜩 싣고 창문가에 다가와 배를 대는 것 아닌가! 우선 반가워 술 한 모금에 담배 한 대를 맛있게 먹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 체통 문제여서 실바에게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극구 사정하여 돌려보낸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이 대체로 밤에 일어났으니 1년 반 넘게 그 흔해빠진 '이스라엘 무협지'(武俠誌, 聖經을 가리키는 도둑님들의 은어)마저 주지 않는 데다 접견도 금지, 통방도 금지, 운동도 금지, 금지, 또 금지여서 할 수 없이 낮시간에는 3부로 나누어 시간을 죽였다.

제1부는 아침부터 12시까지 '민족통일문제의 구상', 제2부는 12시부터 4시까지 내가 20대에 '청맥'(靑脈) 부탁으로 쓰려다 중단한 동학혁명 서사시를 구상하고 그 잊기 쉬운 뼈대들을 나만 아는 암호로 흰 벽 위에 젓가락 갈아 만든 대꼬챙이로 긁어 표시하는 집필 시간으로, 그리고 제3부는 저녁밥 먹고나서 5시부터 취침 때까지 서정시와 현대 한국의 반골열전(反骨列傳)을 머리 속으로 쓰거나 아니면 추억하거나 아니면 비판하거나 아니면 그냥 멍청히 앉아 있거나 아니면 귀를 귀울여 창밖에서 오가는 도둑님들 통방 내용으로 미루어 도둑님들의 삶에 관한 내 스타일의 '율리시즈'를 구상하거나 아니면 그것도 하지 않거나… 뭐, 그랬다.

그것들이 나의 근 1년 반의 대강의 일과였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