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민주화운동세력쪽에는 양심선언이라는 표현 양식이 있었다. 현실적으로, 제도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진실을 알리는 양식. 윤형중(尹享重) 신부님의 착상으로 지학순 주교님이 그 첫 발신자다.
나는 전 세계를 향해 양심선언을 발신하기로 작정했다.
그 이튿날 부우연 새벽녘부터 중요한 글자들을 꼬박꼬박 한 자씩 써서 밖에 숨어 있는 조영래 아우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첫번째 글자 한 자는 우리 방에 단골로 드나들던 쥐가 물고나가 전했고, 그 다음번 글자 한 자는 우리방 바깥에서 늘 돌아다니는 도둑괭이가 물고나가 전했고, 세번째 글자 한 자는 우리방 철창 근처로 왕래하는 개미가 물고나가 전했고, 네번째 글자 한 자는 우리방 바깥에 아침마다 와서 시끄럽게 인사하는 참새가 물고나가 전했고, 다섯번째 글자 한 자는 우리 방 저기 저쪽 미루나무 위에 자주 앉는 까치가 물고나가 전했고, 나머지 글자들은 사방(舍房)을 드나들거나 출옥하는 도둑님들이 하나씩 숨겨가지고 나가 조영래 아우에게 따로따로 전했다.
조영래 아우는 나의 이 친한 벗들이 물어다준 글자들을 한 자 한 자 줄을 세워 꿰맞추고 거기에 엄청나게 아름답고 격조높은 문장을 가필하여 어느날 드디어 양심선언을 완성했다. 양심선언 완성 소식을 나는 지나가던 제비에게 들어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조영래 아우는 그것을 두 갈래로 전파했으니 하나는 진보적인 민중단체를 통해, 다른 하나는 가톨릭 정의평화위원회(正義平和委員會)를 통해 역시 5개 국어로 번역해 그해 8월15일 일본·미국·유럽 세 곳에서 같은 시간에 전 세계 매스컴을 통해 전 인류에게 발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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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언에는 여러 사람의 서방측 저명인사들이 동의를 표명하여 서명했으니 사르트르·보봐르·촘스키·몰트만·카알 라아너·하버마스와 일본의 오에 겐자브로(大江健三郞)과 오다 마코토(小田實)·와다 하루키(和田春樹)·하리오 이치로(針生一郞) 선생 등이었다.
박정희네 동네와 중앙정보부는 발칵 뒤집혔다.
그날 저녁 나는 구치소에 들어온 정보부원들, 그 맨 앞에 선 '메사니' 계장에게 연행되어 7국으로 갔고 초벌조사후 그 이튿날 새벽 특수기동대에 의해 체포된 쥐·괭이·개미·참새·까치와 뭇 도둑님들이 연행돼 조사받았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조사를 할 수 있나? 도둑님들? 도둑님들은 자기네만 아는 은어로 떠들어대니 조사할 수 있다? 나? 나 말이오? 나는 죽여도 시원치 않겠지만 전 세계 언론이 마구 보도를 내보내고 있고 몇 대 갈기면 금방 뒈지게 생긴 걸 어찌 매질할 수 있으리오? 그러매 화를 참고 슬슬 구스를 수밖에 더 있었겠는가.
7 국장께서 친히 지하실로 내려와 난데없는 경어까지 써 가며 가라사대,
"김선생! 장관 한번 안 해 보겠소? 여러 사람이 김선생 재능을 아까워하는데, 어떻소? 우리와 협조해 큰일 한번 안 해보겠소? 농담 아니오!"
이 사건은 이렇게 끝났다.
그러나 양심선언은 러시아말로까지 번역되어 노란 책을 자취없이 쓸어냈으니 그 뒤 나의 팔자는 어찌 됐을까.
허허허!
호강했을리는 만무하고… 허허허허허허!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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