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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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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3>

제7국

옆방에는 누가 있을까. 나직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뱃전에 걸린 녹슨 닻에 감겨 해초들이 스적이듯 기이한 울음소리, 이어졌다 끊겼다 들려오는 저 소리!

문득 흐린 전등 불빛 아래 국방색 허공 위에 눈알 빠진 아버지의 검푸른 얼굴이 떠오른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가 옆방에 끌려와 고문받고 있는 것인가.

또 울음소리가 나직이 옆방에서 들려온다. 이어졌다 끊겼다 들려오는 저 소리! 나는 사흘째 못 자고 있다.

극도로 지쳐 입안이 다 해지고 입술은 부르텄다. 눈알이 뜨거워 주체할 수가 없다. 잠들면 깨우고 잠들면 또 깨우고. 눈을 뜨면 눈알 빠진 아버지의 환영!

겨우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나직이 묻는다.
"우리 아버지가 와 계십니까."
"무슨 헛소리! 당신 아버지가 왜 여기 와?"
"잠 좀 자고 합시다."
"당신 호강하는 줄 알아! 몸이 안 좋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나마 최대한 봐주는 거야! 잠 좀 안 잔다고 죽지는 않아!"

취조는 계속되었다.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양파까기다. 거의 똑같은 질문이 끝없이 반복되다 대답이 전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바로 그 다른 지점부터 파고들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악명높은 양파까기다.

책임자는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스포츠맨 같은 건장한 체격에 완강한 턱을 가진 임전무퇴형. 아마도 구월산 유격대원들이 저런 얼굴일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별명은 '구월산'!

또 한 사람은 빼빼마른 체격에 눈이 날카로워 꼭 면도날 같은 사람. 나는 나중에 나 혼자 그에게 별명을 붙였으니 '걸어다니는 면도날', 유식하게 영어를 붙이자면 '워킹 레이졸!' 나 들어간 첫 날 첫 마디는 '면도날'로부터였다.
"늬가 인혁당 대변인이냐?"

일반 취조관들이 들어와 그 자리에 없는 두 사람에 대해 겁주는 말들을 많이 늘어놓았으니 그 두 사람,'구월산'과 '면도날'이 바로 남한 최고의 타공 명수(打共名手)들이라는 거였다.

초점은 역시 사회주의였다.

옥중수첩에 사회주의 관련 어휘들이 여러 가지가 있었으니 그들은 그것을 가장 유력한 증거물로 들이댔다. 그들의 주장은 '가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라는 것이고 내 주장은 '일종의 민족적인 기독교사회주의의 모색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또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모색 과정에 있는 사람이 나처럼 그렇게 확신에 차서 용감하게 투쟁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으니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불교를 끌어들이듯 내가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에 가톨릭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들과 교황들의 노동회칙, 제3세계 회칙 등을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3 차, 4차, 5차 조서로 거듭거듭되면서 이전 조서는 차례차례 파기된다. 조금씩 조금씩 자기들의 주장을 내 대답을 통해 관철시키면서 끝없이 끝없이 손가락에 인주를 발라 조서에 지장을 찍는 과정이 1주일 동안 잠을 안 재우고 계속되었다.

결국 피로감의 절정에 이르러 잠을 재워 준다는 조건으로 '가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라는 그들의 주장에 반쯤 동의하는 형식으로 어물어물 취조가 끝났다.

잤다. 그리고 깼다.

잤다. 그리고 깼다.

잠을 자고 나니 사람 얼굴이 비로소 보였다.

일선 취조관이었는데 황해도 출신의 계장이었다. 성미가 어지간히 눅은 편이어서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날 듯한 표정이었다.

그이가 되풀이하는 말 중에 이해 못할 어휘가 있었으니 '메사니…'라는 말이었다. 전라도말 같으면 '거시기'일까. '메사니, 당신 사상이란 기 왔다갔다 하는 기야? 거 메사니 웬 사상이 기렇게 복잡해? 나 메사니 공산주의자요, 해버리면 안되나, 그거?"

거기에 대한 내 대답도 지금 생각해 보면 코미디였다.
'뭐 떡입니까. 꿀꺽 하게…."
"메사니 머이 기리 복잡하냐 말이야? 간단히 하자구, 간단히!"
"사상이라는 게 생각인데, 생각이란 게 원래 복잡한 것 아닙니까."

그들은 조사 도중 잠깐 나를 석방할 듯한 눈치를 보였다. 거짓이 아니라 어디 가서 쉰다는 조건으로 인혁당 문제만 걸어 놓고 방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만큼 그들 자신도 전문가답게 나를 무슨 주의자로 보지는 않았으니 내 주장처럼 복잡한 사상의 모색 과정에 있음을 시인했던 것이다. 옥중수첩이 사실 그러했다.

다만 나를 무력화시킨다는 게 그들의 목표인 듯했다. 그러나 아마도 베트남 함락 때문인 듯 며칠만에 태도가 싹 바뀌었다.
'구월산'이 말했다.
"조금만 고생하라구! 뭐 얼마 가겠어?"

<사진>

구치소로 넘어가기 직전에 그들은 최종길(崔鍾吉) 교수가 떨어져 죽은 자리를 보여 주었다.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놨으나 내 첫 짐작으로도 고문에 시달리다 못 견디어 몸을 던진 것 같았다.

제7국! 제7국!

지하실! 지하실! 빙빙 돌아 몇 층을 내려가 있는 그 무시무시한 지하실! 그 지하실에서 벗어나 서대문으로 이송되는 차 속에서 느낀 해방감! 지하실에서 감옥으로의 이동에 불과한 데도 그처럼 화안한 해방감을 느꼈으니 참으로 인간의 자유란 무엇이며 억압과 파시즘이란 또 무엇인가. 그리고 공산주의란 이데올로기는 인간 역사에 있어서 그 무엇인가. 그렇게 숱한 희생자와 순교자를 내고도 완전히 실패한 그 혁명을 우리는 과연 무슨 논리로 설명할 것인가.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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