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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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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5>

사제단

새벽 부우옇게 동이 터올 무렵 극동방송 앞에 있는 댁에서 윤배 형님을 만났다. 정좌하고 앉은 형님 뒤편 벽에 기인 일본도가 한 자루 얹혀 있었다. 삼엄했다. 형님 눈과 생각에 비친 그간의 세상에 대해 알고 싶었다. 형님은 세 가지를 말했다.

첫째는 사제단이었다.
"거, 사제단 말이야! 거 참, 멋있어. 그러나 너무 유럽 냄새가 나! 조선 냄새가 날 수 없냐? 민족적 사제단 말이야. 그래야 통일 주체도 되지."

둘째는 원주였다.
"앞으로 리영희 선생이 원주 장선생을 만나러 자주 걸음할 텐데 양쪽 입장을 조율할 수 없냐? 국민회의의 실제적인 지도력을 형성할 수 없냐 이거야!"

셋째는 이종찬(李鍾贊) 선배의 군부였다.
"괜찮아! 믿고 잊어버려! 잊지 않으면 건강에 해로워! 괜찮을 테니 두고보자고!"

그리고는 그밖에 가장 걱정되는 것을 말했다.
"늬가 제일 걱정이다. 너를 굉장히 노릴 거야! 이제 너 자유롭지 못할 거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오늘이라도 사제단부터 만나라. 그 뜻 알겠지?"
"네."

내 발은 명동성당의 아침미사를 목표로 가고 있었다. 눈부신 아침, 창으로 흘러드는 햇빛과 조명에 빛나는 새하얀 미사. 그 미사는 만원이었다. 입구쪽에서 뒷전에 서서 바라본 성당 내부는, 그리고 미사는 참으로 숭고하고 장엄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내 생전 처음으로 시커멓고 불길한 어떤 것이 거룩한 흰 자리 위에 서려 있음을 보았다. 충격이었다. 환영?

사제단과의 약속을 밤시간으로 정해 놓고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시커먼 불길한 것, 흉칙한 것이 새하얀 자리, 그 거룩한 형상 위에 덮여 있었다. 그것! 그것은 여러 가지 함의(含意)를 갖고 있었다. 나는 치를 떨었다. 무슨 뜻일까.

나는 몹시 지쳐있었다.

그러나 잠들 수 없었고 쉴 수도 없었다. 그 시커멓고 흉칙한 것도 일단 제쳐두었다. 응암동 성당에서 함세웅 신부를 처음 만났다.

우리는 함께 보신탕집에 가 보신탕을 한 그릇씩 먹고 몇 잔의 소주를 하며 아주 간결하게 중요한 의견만 교환했다. 먼저 토착화. 토착화 노력은 장기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근로대중에 관한 것. 중요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민주회복국민회의. 함신부가 대변인이었다. 그런데 아마도 '이제부터는 김시인이 대변인을 맡아줄 수는 없을는지?'

<사진>

그날 밤.

명동 전신상(全眞常)문화관에서 사제단 신부 10여명과의 상견례(相見禮)가 있었다. 날짜와 얘기 내용들이 헷갈린다. 그날에도 그랬으나 지금까지도 그 시커먼 불길한 어떤 것이 자꾸 개입했었고 지금도 간섭하는 것 같아 정확한 기억이 아닌 듯도 하다. 그러나 대충 있었던 일만 요약한다.

그날 밤. 그 자리에서 지속적인 반유신 민주화운동은 국민회의를 지도부로 하여 진행할 것. 그 과정에서 농민·노동자·여성·실업자·저소득층과 정치적으로 불만이 있는 중산층의 이익과 견해를 대변하는 여러 기구들을 사제단의 노력으로 교회 안팎에 구성할 것.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남북간 화해와 연합을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민족적 주체를 국민회의 안에 성립시킬 것 등을 강조했던 것 같다.

그 때 그 자리.

기억은 섬세해진다. 두 사람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은 "그렇게 하지, 뭘!"이었고, 정호경 신부님은 "하하하 좋은데…."였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물러나 정릉으로 돌아왔다.

깊이 깊이 잠들었다.

그러나 악몽으로 끊임없는 잠꼬대였다고 한다. 시커먼 그 어떤 것? 내가 가톨릭을 그만두게 된 몇 가지 동기 중의 첫번째 동기다. 그러나 이것만은 지주교님께도 얘기하지 않았다. 아마 내 짐작으로는 이 시커먼 불길한 것과 흰 길은 그후 아득한 뒷날 '흰 그늘'에서 그 분열이 통합되는 건 아닐는지….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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