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해외여행을 하시던 지주교님이 종합검진을 위해 명동성모병원에 입원하셨다. 만나자는 전갈이 와 병원으로 갔다. 밤이었다. 병실은 불을 꺼 컴컴했다. 창밖으로 명동 거리의 색색이 아리따운 보석같은 등불들이 빛났다.
지주교님과 나는 서로 정보를 교환한 뒤 국내와 국외에서 그물망이 잘 짜여지고 있다는 것, 문제는 그것을 잡아당길 그물코 중의 그물코인 가톨릭, 한국가톨릭, 그것도 사제단이 아직 잘 구축되지 않고 있고 추기경과 안동교구의 프랑스인 듀퐁 주교, 그리고 광주의 윤공희(尹恭熙) 주교와 지주교님이 서로 접근하고 있을 뿐 주교단은 아직도 싸늘하다는 것.
내쪽의 얘기 역시 주교님을 통해 청년 학생이나 기타 혁신적인 세력과 가톨릭의 연결만 확실하게 되면 커다랗고 파괴력 강한 전세계적 반유신 전선(反維新戰線)이 형성될 것인데 그 연결이 문제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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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교는 한숨 섞인 한마디로 왈,
"결국 나로구나."
"네. 그렇습니다."
주교님은 침대에 기대서서 바깥의 휘황한 불빛들을 내다보시며 또 한마디,
"자네 떼르뚜리아누스의 말을 아나?"
"그리스도교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
"그래!"
"그렇다면…."
"내 피를 마셔야만 가톨릭이 일어설 거야. 가톨릭이 일어서야 다른 종교와 시민들, 외국 여론이 일어서고…. 결국 내 피를 봐야 돼!"
"그렇다면…."
"자네는 각오돼 있지? 체포되거든 불어! 내가 구속돼야 해! 그래야 사제단도 주교단도 정신차리고 수녀들, 장상회도, 평신도회도 다 태도를 달리할 거야!"
"건강이 안 좋으신데…."
"그게 모두 내가 흘릴 피지, 피야!"
"명심하겠습니다."
"자네! 다시 고생 좀 하게. 나와 함께 한번 더 고생을 해!"
"그러지요. 그러나 상당한 정도로 파도를 일으킨 뒤에 예를 들어 가톨릭 다음 개신교, 그 다음 불교, 그 다음 지식인과 기업들, 또 군부까지… 그렇게 되어갈 때 감옥에 가야겠죠. 너무 빨리 들어가면 우리 방향대로 뒷일이 풀려가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겠다."
"제가 들어간 뒤에야 주교님이 들어가시게 됩니다."
"그건 알고 있어."
"건강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해외의 많은 사제들에게 기도하고 도우라고 말씀하십시오."
"하고 있어. 그건 문제가 없는데… 박정희가 나를 구속할 것 같지 않아!"
"그것은 장선생님과 의논하십시오."
"그래야겠지. 아까 그것을 뭐라고 했지? 넘어지면서…."
"슬라이딩 태클이요."
"슬라이딩 태클! 슬라이딩 태클! 십자가로구나, 결국!"
나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
중앙극장 앞을 지나 인사동으로 갔다. 인사동 한 술집에서 큰 글라스로 소주 한 컵을 마시고 동숭동 대학가로 갈 작정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래!
그때 나의 시 '빈산'이 나왔지.
지치고 피로했을 때 지주교님까지 다 함께…. 그리고 죽음을 각오했을 때, 그때….
빈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오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저 아득한 산
빈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속에 저 침묵한 산맥속에
숨어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줄도 몰라라.
지금도 화안히 기억한다.
'빈산'이 이종구(李鍾求) 아우의 작곡으로 녹음되었을 때 문화촌 입구의 한 허름한 여관방에서 밤새도록 녹음 테이프를 틀고 또 틀어대면서 한편 소주를 마시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김민기 아우의 그 티없이 해맑고 짙붉은 비극적 감수성, 그리고 좋은 작품은 사람을 안 가리고 칭송하는 그의 프로페셔널다운, 예술가다운 태도….
그리고 기억한다.
이종구의 '빈산'은 1970, 80년대 전시기의 저항 속에서 태어난 유일한 '클래식'으로 일관되어온 작품이라는 것. 이것은 내가 아니라 김민기의 평가다.
그리고 '빈산'은 아아, 참으로 나의 지친 영혼이, 죽음을 앞에 두고 부르는 영가(靈歌)요, 생사를 넘어선 결심이라는 것. 여러 평론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월간중앙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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