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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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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9>

함석헌(咸錫憲) 선생

이쯤에서 볼펜을 놓고 조용히 생각하니 내 심안(心眼)에 웬 새하얀 영상이 떠오른다. 하얀 머리, 하얀 수염, 하얀 두루마기, 하얀 신발. 함석헌(咸錫憲) 선생님이다.

왜 통 기억되지 않던 어른이 하필이면 이 대목에서 기억의 장막을 들추고 다가오시는 걸까?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4·19때 원주에서고, 가까이 모신 것은 '오적' 직후다. 누군가 내게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가라고 했다. 그렇다. 누군가 내게 효창동 댁도 일러주었다. 누군가 내게 선생님을 뵙고 민족에 대해 말씀을 들으라고 했다. 누굴까?

나는 그날 낮 열두시쯤 선생님댁 앞에 우뚝 서있었다. 대문도 울타리도 없었던 것 같다.
의식의 수정일까? 아니, 참으로 그런 건 없었던 것 같다. 거추장스런 인사와 예절도 생략되었던 것같다.

<사진>

흰빛.
나는 그날의 흰 빛만 기억할 뿐이다.

선생님의 흰빛, 그날 대낮의 흰빛, 자그마한 댁의 흰 벽에서 반사해 오는 햇빛의 눈부심.
그것밖엔 없다. 뭐라고 하셨는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조차 전혀 기억에 없다. 그리 오래 머무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선생님은 어디론가 외출을 나가시는 중이었다. 흰 구두가 기억난다. 흰 구두를 신는 사람은 근자엔 없다. 흰 길. 흰 길을 가는 흰 구두.

새하얀 빛.
그 빛을 오적의 법정(法廷)에서 또 뵈었다. 돌아보니 웃고 계셨고, 곁엔 장준하 선생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때 노을이 붉은 빛을 띠기 직전에 눈부신 흰 빛으로 타오른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 하얀 첫노을이 비낄 때 나 들어있던 서대문감옥 8사(舍) 상층으로부터 마주 보이는 9사 입구에서 웬 웃음소리가 크게 들리고 흰 옷 입은 젊은 수인(囚人)이 한 사람 비틀거리다 흰 모래 위에 쓰러지는 환상을 보았다. 한 종교 지도자가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가 사라지면서 흰 옷 입은 젊은이가 자꾸만 쓰러졌다.

재판이 끝나고 법정 밖 모래마당으로 나섰을 때 선생님의 흰 손이 기일게 뻗치면서 내 어깨 위에 놓였다. 교도관이 그 손을 떼어냈다. 내가 뒤돌아보았다. 그때 선생님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커다란 두 눈, 그 봉안(鳳眼)이 교도관을 보고 있었다. 햇빛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노을이 짙게 깔리고 어디서 들개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며 구치소의 철문이 덜커덩 닫혔다.

그 웃음소리는 함선생님의 것인가?
선생님은 재판 때마다 오셨다. 나는 시작할 때 한 번, 끝날 때 한 번 꼭 두 번씩 목례하고 선생님의 흰 빛을 뵈었다.

그리고는 그 뒤, 대통령선거때 투개표감시단으로 떠났던 대학생들이 돌아와 보고회를 열고 내가 사회를 맡았던 종로5가 기독교회관 1층 홀에서 선생님은 강연을 하셨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기억에 없다.
다만 선생님의 측근 제자인 박세정(朴世貞) 형이 광주 연무대에서 벌어진 군장교들의 부정투표 광경을 담아온 사진을 공개하며 그 행위를 고발 규탄하다 끌려가던 일,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생님의 그 이글이글 타오르던 두 눈, 그 봉안만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두 눈의 흰 부분에 붉은 실핏줄이 사방으로 뻗치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 뒤 아카데미하우스에서 한 번, 월간 '다리'지 편집실에서 한 번,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개최된 전태일 기념 강연회에서 한 번 뵈었다.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옛날 역촌동 시립서대문병원에 폐결핵으로 입원해 있을 때, 갑자기 각혈을 해서 내리 누워만 있을 때, 그때 선생님을 따르던 한 환자가 내 요청으로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한 부분, 로댕의 늙은 창녀로 한국사를 비유한 그 부분을 숨찬 목소리로 읽어주던 일만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다만 선생님이 번역하신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의 한 부분, 예언자가 올팔레즈 포구를 떠날 때의 정경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또 하나 '다리'지 편집실에서 내게 거듭 권유했던 책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의 주요 부분인 진화의 3대법칙만이 기억에 우뚝하게 솟아오르듯 남아 있다. 그리고는 유신 이후 YMCA에서 반유신 선언식을 가졌다가 종로서로 연행됐을 때 이외엔 없다.

아니 있다.
그 뒤 안양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씨알의 모임 연수회에서다. 그날 선생님의 흰 빛은 사방으로 번지며 장준하 선생이 되고, 김동길(金東吉) 교수가 되고, 안병무(安炳茂) 교수와 계훈제(桂勳悌) 선생과 이문영(李文榮) 교수로, 그리고 또 여러 제자들의 눈빛으로 낯빛으로 변하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붉은 노을이 새빨갛게 탔다.

노을 무렵에 나는 그곳을 떠났다.
장준하 선생의 자동차를 타고 선생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서울로 올라왔다.

"함선생님께서는 무엇인가 창조적인 새 사상이 나올 듯 나올 듯 하면서도 안 나온다고들 말합니다. 어찌 보세요?"
"지금의 그 모습이 그대로 바로 그 창조적인 새 사상의 하나가 아닐까요? 어찌 생각하십니까?"

"너무 성서 안에 묶여 계신 건 아닌가요?"
"그렇지도 않지요. 다석 선생 이후 노자(老子)에 열중하고 계신데 그쪽에서 뭔가 나오지 않을까요?"

"정치적 견해는 어떠십니까?"
"단순한 자유주의는 아닐 겁니다. 민족적인 바탕 위에서 성서가 계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에 어떤 이념 아닌 이념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만…."

"선생님의 흰 빛은 조선적인 겁니까?"
"그럼요. 다른 것 같습니까?"

"동학과는 무관할까요?"
"…."

나는 장준하 선생으로부터 함선생님의 정치적 전개를 보려고 했다. 7·4공동성명 직후 장준하 선생의 전율적인 발언이 기억나서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속에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다 들어 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번영과 복지, 이 모든 가치들이 통일 속에서 결합 성취되고 통일이 불가능할 때엔 모두 다 소멸한다."

아, 그렇다. 그 청년, 쓰러지던 노을녘의 그 청년은 바로 이 사람! 장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래밭은 척박한 분단 조국이었다. 그의 통일은 인류사의 새 차원의 기폭제였으며, 지금도 역시 우리들의 깃발인 것이다.

마치 흰 빛이 스러지고 노을이 붉게 타다 타다가 이윽고 밤이 되듯, 그렇게 함선생님도 장선생도 이제 더 이상은 뵐 수 없다. 그러나 지금도 선생님은 내게 흰 빛으로, 그리고 그 웃음소리로 남아 있다.

지브란의 예언자가 올팔레즈를 떠나듯 그렇게 떠나신 뒤 웃음소리만 웃음소리만 흰 빛으로, 흰 빛으로!

그리고 서서히 타오르는 붉은 노을로, 노을로, 노을로!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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