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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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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8>

金大中 선생

존 델리.
예수회의 정일우 신부.
돌아간 우리들의 벗이자 나의 좋은 아우인 제정구(諸廷坵) 의원의 큰 벗 정신부. 정신부를 통해 김대중 씨에게 연락이 갔다. 신촌에서 서강대로 들어가는 초입 한 골목에 대중 씨의 아우 대의(大義) 씨의 집이 있다.

그 집에서 이희호 여사와 함께 두 번 만났다. 첫 번은 우리의 반유신투쟁이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갈 것인지를 설명, 예측하고 대중 씨가 어떻게 해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두번째 역시 이희호 여사와 함께였다.

기억한다.
밖에 흰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대중 씨는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내 첫마디는 다음 한 마디였다.

"돈을 좀 내놓으십시오."

대중 씨에게서 돈이 나왔다. 아마 그때 돈 7만원 정도 아니었을까?
"이것으로 모자랍니다. 사모님도 좀 털어 내놓으십시오."

이여사가 핸드백을 뒤져 약 8만원 가량을 내놓았다. 그것을 모아 내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나는 칼로 무를 싹둑 자르듯 단언(斷言)했다.

"이것은 자금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내 교통비를 줬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즉각 잊어버리십시오."

그때의 김대중 씨의 눈.
마치 강도를 만난 것처럼 놀라 크게 열린 두 눈. 그 두 눈을 나는 내내 잊지 못한다. 아마 그이도 못 잊을 것이다. 생전 처음 길바닥에서 그런 날강도를 만난 것이니 잊힐 리가 있겠는가? 뒷날 내가 목동아파트에서 병으로 누워 있을 때, 어찌 알았는지 내게 돈 1백만원과 함께 편지를 보내왔었다.

그리고는 지난해 겨울 인사동(仁寺洞)에서 묵란전시회를 할 때 청와대 부속실장을 통해 돈 3백만원을 보내왔다. 나는 즉각 묵란 한 점 좋은 것을 골라 대신 보냈다. 묵란 가격은 지난해말 2백만원에서 4백만원까지였었다.

돈! 돈! 돈!
그 이가 왜 돈에 휩쓸려'게이트' 속으로 들어가 버렸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자수성가(自修成家)와 고군분투(孤軍舊鬪)의 긴 세월에 돈에 대한 집착이 체질화되고, 그것이 아들 3형제에게까지 대물림된 것 아닐까?

이어서 생각나는 게 세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오적' 사건으로 감옥에 있다 나왔을 때 국회에서 그동안 나를 옹호해준 것에 대한 인사로, 그러나 그것보다는 당시 내가 기획했던 반박투쟁(反朴鬪爭)의 최전선(最戰線)에 세울 마땅한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야전사령관(野戰司令官)을 물색하기 위해 동교동에 갔었다.

내 첫마디는 다음이었다.

"항간(巷間)에 김선생이 사쿠라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여기에 대한 변명성 대답이 꼭 두 시간이었다. 꽤 지루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이가 독서인(讀書人)이라는 점이었다. 비록 2류, 3류 사상가의 책들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이의 기억력이다. 총총했다. 인용이 정확했던 것이다. 또 문장의 구성력이 괜찮았다. 그리고 건강이 매우 좋아 보였다.

나는 그 방에 들어가 처음 한 마디 했듯이 나올 때도 꼭 한 마디밖엔 안했다. 할 틈도 주지 않았었지만. 나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어디선가 들으니 지도자가 되려면 말이 적어야 한답디다."

<사진>

김대중 씨 얘기가 나왔으니 김영삼(金泳三) 씨 얘기가 안 나올 수 없다.
처음 만난 것은 그이가 신민당 대선 후보전(大選候補戰)에서 패배했던 날 밤이다. 현승일(玄勝一) 형과 합의한 것은 "이럴 땐 패자를 찾는 법이다"였다. 그이의 비서(秘書)를 통해 말을 넣고 중국집 아서원(雅敍園)으로 가 만났다. 술이 거나해서 자꾸만 눈물바람을 하며 김대중 씨를 사기꾼, 도둑놈이라고 욕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며

"일개 필부(匹夫)도 우는 것을 삼가는데 대권(大權)을 생각하는 분이 그리 쉽게 눈물바람을 하다니 실망입니다."

김영삼 씨를 두번째 만난 것은 종로에 있던 그이의 사무실에서였다. 무슨 얘기 끝에 그이의 종교관, 개신교관이 나오게 되었다. 왈,

"19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말이오…."

무식은 죄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인, 지식인들을 상대해야 할 반독재투쟁 전선의 선두(先頭)에 서서 '19세기 종교개혁론'을 부르짖는다면 어떻게 될까?

헤어질 때 금일봉을 내놓았다. 확실히 '도련님 출신'다웠다. 기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건 이 때문인 듯도 했다. 나의 대답은 이랬다.

봉투를 그대로 돌려주면서

"요즈음 형편이 안 좋아 거제의 토지까지 팔았다고 들었습니다. 이 돈은 내가 김선생께 드리는 겁니다. 보태 쓰십시오."

웃었다. 어이없어 하는 웃음이었는데, 그 웃음이 바로 그이의 보석인 듯했다.

세번째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있는 술집 '세종'에서다. 둘 다 술이 거나했다. 김영삼 씨 왈,

"이 나라 이 민족이 갈 곳이 어디입니까?"

유신이 있고 난 뒤다.

그이의 얼굴이 왜 그날따라 멋쟁이, 풍류객처럼만 비쳐졌는지 모르겠다. 내 대답은 나도 뜻밖이었다. 술 때문?

"이제부터의 투쟁은 진흙밭 개싸움입니다. 김선생처럼 곱상한 얼굴에 부잣집 도련님 기질로는 감당하기 힘들 겁니다. 허허허."

대단한 실례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두 김씨의 비교는 끝났다. 왜냐하면 그 무렵 김대중 씨는 일본과 미국에서 이미 망명정권(亡命政權)을 추진하고 있었으니까.

다시 얘기가 김대중 씨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그이를 두번째 만났을 때였다.
대좌하고 있는데 이여사가 들어와 말했다.

"홍익표(洪翼杓) 선생이 가물치를 보냈어요. 회를 떠놨으니 오십시오."

가물치라!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대접한다니 사양하는 것도 예절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대중 씨는 바삐 일어서며 가라사대,

"그럼 김형! 난 좀 바빠서 이만 실례해야겠소."

자리를 급히 떴다.
그이는 김지하가 아니다. 그이는 김지하와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구별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이는 지사(志士)나 운동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포지트' 쪽의 누군가가 확고히 서야만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었다. 왜냐하면 큰 실례이기는 하나, 지주교님, 천관우 선생님, 함석헌 선생님, 김재준 목사님과 지식인들은 모두 하얗고 깨끗한 학(鶴) 같은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독재운동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운동이 진짜 투쟁으로 고질화하고 진흙밭 개싸움으로 변했을 때에도 일단 자기 목숨에 관계없는 개싸움에 목을 바칠 것인가? 이해관계가 있어야 끝까지 가는 것 아닌가? 아니, 최종점은 아니라도, 중간에 타협이 있다 하더라도 그 타협을 또 팽개칠 수 있는 개싸움이나마 전술이 나올 사람은 정치꾼 아니겠는가? 내 생각은 그랬다.

천관우 선생님과 원주의 청강(靑江) 장일순(張壹淳) 선생님은 김대중 씨를 민주화 노선의 선두에 세우는 것에 크게 반대했다. 그것을 관철시킨 것은 순전히 나의 고집이었다.

그래서 이런 일도 있었다.
세번째 얘기다.

내가 서대문 감옥에서 출옥한 뒤의 일이다. 교구청을 통해 독일대사관측에서 주교님과 나를 특별히 초청했다. 장소는 남산의 독일문화원이었다. 무슨 영화를 상영하느라 어두운데, 안내를 받아 한 자리에 앉으려던 나는 흠칫 놀랐다. 바로 내 옆자리에 이희호 여사가 앉아 있지 않은가!

그때는 대중 씨가 아직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였다. 이여사의 부탁을 독일대사관의 한 문화원이 대행한 것이다. 무슨 요청일까? 이여사가 귀에 대고 소근댄다.

"김선생이 지금 고민이 심합니다. 청와대와 중정이 타협을 바랍니다. 타협하면 미국으로 보낸답니다. 미국의 요청입니다. 어찌하는 게 좋으냐고 비공식 채널로 소식이 왔어요. 김시인께 물어보라는군요. 어찌해야 하느냐고.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타협의 조건은 정치활동 중단입니다. 어떻게…."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전쟁과 정치는 타협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는 영역입니다. 우리네는 다르죠. 전쟁과 정치는 모가지만 붙어 있으면 또 하고 다시 하는 것 아닙니까? 더욱이 극단적 억압 아래서는 그것이 도리입니다. 타협하라고 하십시오. 일단 중단했다가 안팎의 정세를 봐서 다시 하면 되지요."

"앞이 툭 터지는 것 같군요."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하십시오."

그랬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있었다. 김대중 씨가 미국으로 건너간 뒤의 일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전에 외무부 장관 하던 노신영(盧信永) 씨였는데 내게 네 번인지 다섯 번인지 면담요청이 왔었다. 나는 일절 거절하고 있었으나, 이 소식을 들은 장선생님에게 크게 지청구를 들었다.

"이 사람아, 원수 아니라 악마라 하더라도 그 정도로 요청해 오면 그중 한 번쯤은 만나줘야 예절 아닌가? 우리가 그런 예절을 잃고 나면 무엇이 남겠나? 만나게!"

이래서 나는 정보부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궁정동 안가. 바로 그 방, 박정희가 죽은 바로 그 방이었다. 나는 그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안락의자에서 막 일어서는 노신영 씨에게 대뜸 물었다.

"하필 왜 이 방입니까?"
"이 방을 아십니까? 어떻게 아십니까?"

"직감이지요."
"허허, 놀랍군요. 맞긴 맞습니다만 김시인 같은 분이 저어하실 일은 아닌 것 같군요."

노신영 씨는 듣던 대로 몸과 매너에 외교관 티가 철저히 배어 있는 신사였다. 함께 식사라도 하자고 부탁했다고 했다. 함께 식사하면서 얘기를 나눴는데 주로 노신영 씨가 말을 했다.

"제 부탁은 김시인께서 외유(外游)하실 생각이 없느냐는 겁니다. 편의는 우리가 다 알아서 봐 드릴 겁니다. 외국 견문을 넓히는 과정에서 조국에 대해 조금씩 안쓰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들고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도 알게 될 듯싶어서지요. 가능하겠습니까?"

나는 끝끝내 확답을 피했다. 그 얘기가 계속되는 중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얘기가 섞여 나왔다.

"김대중 씨 잘 아시지요? 애국하는 방향이야 각기 다르니 뭘 따지겠습니까마는 요즘 나라의 외환 사정이 매우 나쁩니다. 그런데 자기 동산 전체를 달러로 바꿔주지 않으면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해요. 미국에 안 가면 어떡합니까? 큰일나지요. 그래서 바꿔는 줬습니다만 웬 돈을 그렇게도 많이 가지고 있는지? 그걸 모두 달러로…? 조금 서운했습니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나는 모른다. 그리고 그 원인도 이 나라의 현실정치사에 있을 것이니 김대중 씨만 탓할 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그렇게 입장과 시각을 정리하고 나서도 뭔지 안 좋은 느낌이 남는 것은 웬일일까?

홍삼(弘三)…?
홍삼(弘三)…?

나는 대중 씨가 은퇴했던 정치(政治) 일선에 다시 복귀한다고 했을 때 '중앙일보'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공인(公人)이 거짓말을 밥먹듯 한다고, 정치를 재개할 때는 그만한 사유(事由)를 국민 앞에 밝혀야지 도둑이 담넘듯이…? 박정희나 전두환 등의 탄압 아래 있을 때와는 처신(處身)이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으로 나와 그이의 관계는 끝났다. 그러나 나만이 아니다.
그이가 망명 시절 일본에서 가장 크게 신세를 진 암파서점(岩波書店) 야쓰에(安江) 사장 역시 김대중 씨에게, 대정치가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니 도하 신문에 큰 광고를 내서 국민이 납득할 만한 정치 재개의 이유를 밝히라고 했다가 일종의 절교를 당했다.

이런 것들은 또 어찌 봐야 하는가?
문제는 그가 반독재민주화 세력의 정치지도자만이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으로까지 지도자연해 왔고 그로 인해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는 데에 있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하여튼 그때 그이는 돈을 내놨다.
조영래 아우의 말처럼 돈 가는 데 마음 가고, 조직투쟁에서는 돈 출처가 상부선으로 되는 것이니 그 의도는 적중한 셈이다.

그러나 나와 조영래 아우의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오늘날과 같은 난장판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그렇다면?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점만은 명백히 해두자.

과(過)는 적거니와 그이의 공(功)을 너무 무시하고 잊거나 끌어내리면 그이와 함께 고통받고 그이와 함께 투쟁했던 우리 모두를 무시하고 잊거나 끌어내리는 것이 된다. 그이가 그만큼 애써 싸웠고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어온 것,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던가!

아닌가?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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