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안 있어 서울대 문리대에서 기독학생회 주최의 반유신대회가 있었다. 당국은 아직 결단을 못한 채 묵과했고, 주모자도 처벌되거나 구속되지 않았다.
그것은 파도였다.
아무리 애써 외면한다 하더라도 그 파도는 연이어 올 것이며 처벌하거나 구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처벌하거나 구속하면 그 파도는 더 거칠어질 것이다. 반유신은 이제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자유다. 수십년간의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교육 자체가 박정희의 적이었다. 그리 호락호락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막으면 막을수록 거세어질 것이고, 그럴수록 그 힘은 커져서 드디어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적인 전선(戰線)을 만들 것이었다.
개신교 학생들의 선제공격(先制攻擊)은 의미심장했다. 그것은 이미 국내외에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어서 '한국기독학생총연'(KSCF)과 '한국대학생크리스찬연맹'은 광주에서 대규모 수련대회를 열었다. 그곳에 초청되어 한밤중 광주에 도착했다. 찾아 찾아서 회의장인 가톨릭 대건신학교 건물에 들어선 나는 깜짝 놀랐다. 작은 홀에 남녀 대학생과 젊은 지도자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 차 노래하고 웃고 떠들며 발을 굴렀다.
첫 느낌이 벌써 한국의 청년기독교는 반유신투쟁을 통해 융성할 것임을 감촉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지난번 YMCA에서의 선언 이야기와 서울대 문리대 기독학생회의 시위 이야기가 튀어나오고 '유신철폐'의 열렬한 외침이 건물 전체를 흔들었다. 토론에서도 타궁(Tagung)에서도 변함없이 반유신의 열기로 인해 뜨거웠다.
한 모임에서 내가 한 짧은 연설 역시 다름아닌 민주주의자의 자존심 얘기였고, 자유의 정서 얘기였으며 결국 유신철폐의 당위성에 관한 것이었다. 더 이상 머무를 필요도 없었다. 대만족이었으니 이제 다만 KSCF와의 연락선만 구축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곳을 나오며 나는 또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럴 때 조영래가 있다면…."
나는 지난번 문리대 시위의 주동자인 나병식(羅炳湜) 아우와 함께 그 건물을 떠나 캄캄한 광주천변의 한 작은 해장국집에서 기차가 출발하는 새벽녘까지 함께 술을 마시며 정확하게 나와의 약속일자를 잡았다.
파도는 또 왔다.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白基玩) 선생이 주동하는 백만인개헌청원서명운동(改憲請願署名運動)이 그것이었다. 1차 10여 명의 명단에 내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 무렵 '서울신문'에 있던 악어(鰐魚) 형님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네를 주목하고 있어. 주의하라고!"
그러나 서명자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었다. 이제 활동가들만의 투쟁기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투쟁이 대중화되어 가고 있었다.
또 다시, 이번엔 조금 다른 파도가 왔다. 문인들의 반유신선언이었다. 백낙청 교수가 주동했고 수십 명의 문인들이 참가했다. 오전 10시경 명동성당 아래쪽의 한 찻집에서였다.
그 선언식이 끝나고 성당의 충무로쪽 뒷문 곁에 있는 '가톨릭 전진상(全眞常)문화관'에 들러 프랑스인 사도직 협조자 '꼴레뜨' 씨와 독일인 사도직 협조자 '씨그리트' 씨를 만나 정세에 대한 이야기와 가톨릭의 사명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두 분 다 가톨릭이 떨쳐나서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 작은 건물에서부터 그 뒤 10여 년 이상 구속자가족협의회 등을 비롯한 직·간접적인 유신철폐 함성의 뭇파도가 일어날 것을 이상하게도 나는 어슴프레한 환영처럼 그때 예감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곳이 운동의 한 거점(據點)이 돼야 한다고 판단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날 오후 충무로.
나는 길가에 세워둔 웬 승용차의 문이 문득 열리며 그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라디오 뉴스에 귀가 번쩍 뜨였다. 유신헌법에 규정된 긴급조치 1호 발동 뉴스였다.
<사진>
나는 곧바로 서울신문의 악어(鰐魚) 형에게, 그리고 윤배 형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종찬 선배에게 연락을 취했다. 조금 있다 두 쪽에서 거의 동시에 똑같은 기별이 내게 왔다.
"위험하다. 장준하·백기완이 구속될 것이다. 보안사다. 아마 몹시 맞을 것 같다. 서울에 있지 말고 바로 지금 피신해라. 지금 곧 서울을 떠나라!"
군종단(軍宗團)의 이냐시오에게 돈을 빌려 즉각 내설악을 거쳐 동해안으로, 강릉의 외우(畏友) 건축가 권혁구(權赫龜) 형에게로 피신했다.
강릉의 바닷가 한 쓸쓸한 여관방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끄적거린 시 두 편이 아득한 세월에서 지금에로 지금에로 파도쳐 온다. 먼저 '1974년 1월'이다.
1974 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날 그날
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바람찬 저 거리에도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나올 그 함성을
못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년 1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네 손에 남은 마지막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
경포 근처의 그 바닷가 파도는 끝없이 끝없이 밀려오고, 나는 한없는 우수(憂愁)에 젖어 또 한 편의 시 '바다에서'를 끄적였다.
눈은 내린다
술을 마신다
마른 가물치 위에 떨어진
눈물을 씹는다
숨어 지나온 모든 길
두려워하던 내 몸짓 내 가슴의
모든 탄식들을 씹는다
혼자다
마지막 가장자리
삔으로도 못메꿀 여미사이의 거리
아아 벗들
나는 혼자다
손목에 패인 사슬의
옛 기억들 위에 소주를 붓고
기억들로부터 떠오르는 노여움에 몸을 기대어
하나하나 너희들의 얼굴을
더듬는다
흘러가지 않겠다
눈보라치는 저 바다로는
떠나지 않겠다
한치뿐인 땅
한치도 못될 이 가난한 여미에 묶여
돌아가겠다 벗들
굵은 손목 저 아픈 노동으로 패인 주름살
사슬이 아닌 사슬이 아닌
너희들의 얼굴로 아픔속으로
돌아가겠다 벗들
눈 내리는 바다
혼자 숨어 태어난다
미친 가슴을 찢어 활짝이 열고
나는 아이처럼 울부짖는다
돌아가겠다.
내가 그무렵 눈보라 속에서도 본 것은, 계속 본 것은 단 하나뿐.
그것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뿐이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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