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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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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1>

주석균(朱碩均) 선생

원주에 돌아온 직후 교구청에서 불러 올라갔더니 귀한 분이 와 게셨다.

한국 농민운동의 어버이이신 주석균(朱碩均) 선생이었다. 농림부 차관도 하셨고 동백림사건 때는 억울한 옥고도 치르셨다.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김병태 교수와 이우재 교수를 가르친 선생님이다.

선생은 지주교님, 장선생님 그리고 영주 형님, 김병태 교수와 함께 앉아 식사를 하면서 한국 농촌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우리의 미래는 농업의 협업화와 자주적 경공업을 배합하는 데에 있으며 박정권의 대외의존적 중공업 드라이브는 재벌과 유산(有産)계층을 산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사회적 모순을 심화시키고 민족경제와 농촌의 파탄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에 대체로 동의했다. 이 모순을 호도하고 그 파탄을 미봉하려는 술책이 바로 종신 총통제의 다른 표현인 유신이므로 이를 저지하고 농공업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세울 수 있는 새 민주정권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떠날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선생은 미소띤 얼굴로 내게 말씀하셨다.

"곧 아이가 태어난다면서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나 김시인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요."
"무슨 부탁이신지요?"

"첫 아이인데 그애 태어나면 내가 이름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실 수 없겠는지요?"
"그러십시오. 저로서는 영광이올시다."

"하하하, 고맙소. 고마워!"
그리고는 헤어졌다.

훗날 감옥에 있을 때 면회온 가족에게 들으니 첫 아이가 태어나자 연락을 받고 당신의 가까운 벗이며 한국 제일의 역학(易學) 전문가인 한국은행의 한웅빈(韓雄彬) 선생께 부탁했다고 한다. 한선생은 곧 사주(四柱)를 듣더니 껄껄 웃으며 자기가 따로 간직했던 두 개의 출중한 이름 가운데 하나를 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곧 둥글 원(圓), 넓을 보(普)이다. 김동리(金東里) 선생이 원보의 이름을 보고 좋다고 하면서 이름자는 둘로 접어 양쪽이 똑같아야 좋은 이름이라고 했다 한다.

김원보(金圓普).
내 첫 애의 이름을 입 속으로 발음할 때마다 돌아가신 주선생님의 생애와 인품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먼저 우리 농업의 협업화를 통해 생태계 오염 붕괴 방지와 그 대안을 미리 예감하신 것같아 마음의 깃을 여미게 된다.

그리고 한선생님께도 깊은 고마움을!

주선생님은 내 아들의 이름을 통해 한 후배에게 기억되고 싶어 하셨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아끼는 마음, 곧 선비의 본분인 '어짐'(仁)을 체현(體現)한 것 아니었겠는가!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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