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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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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0>

포위

그 여름 참모들의 판단에 따라 지주교님은 일본대사와 미국대사를 차례로 만났다. 극비리에 장시간에 걸쳐. 그때 주교님은 명예와 목숨을 걸고 그 회견을 단행하는 듯했다. 그 이상은 역사에 묻어버리겠다. 다만 그것이 병법상으로 불가피한 포위의 일환이었다는 것만 말하고 넘어가자.

일본이야 자국민(自國民)인 다찌카와와 하야카와를 구속했기 때문에 그 회견의 정신을 훨씬 넘어 연일 한국을 비판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사형을 비롯한 중형을 선고받았을 때 미국 의회가 곧바로 군원(軍援) 중단의 목소리를 높인 것이 바로 우리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 이 사실만 지적해도 충분하겠다.

포위!
그렇다.
우리는 포위하려고 했고 포위망을 짜려고 했으며 그것을 위해, 그것을 성취시켜 한 차원 높이기 위해 주교님과 나 그리고 아우들에게까지도 이른바 '슬라이딩 태클'을 주요 전술로 보편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 여름 어느 날, 마산의 가포 병원에 들렸다 나온 뒤 나는 마산항 부두에 서 있었다. 왜 거기를 갔는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여수 가는 배를 타려고 했던 것 같다. 그때 경찰관이 다가와 동행을 요구했다. 간단한 조사를 받은 뒤 경찰서에서 나는 겨우 그 까닭을 알았다.

일본에서 김대중 씨가 납치됐다 풀려나 동교동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비상경계령이 내려졌고 철도와 항만에서는 수상한 사람을 조사했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나는 반유신운동의 적기(適期)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왜냐하면 미군 항공기가 납치범들을 위협해 김씨가 풀려났다는 얘기를 그날밤 오동동의 한 술집에서 마산의 어떤 후배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포위될 것이다.
투쟁은 불붙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이념, 새로운 세력이 서서히 등장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죽어도 좋다.

새로운 차원을 열기 위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박정희는 몰락할 것이다. 그러나 아주 서서히 몰락할 것이다. 그 과정은 새로운 민중의 힘, 새로운 지식인들의 리더십을 세워 이 사회의 패권이 바뀌는 서서한 전변(轉變)의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세력이 그리 쉽게 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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