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9>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9>

일본

내가 병법을 읽었다면 틀림없이 나무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시인(詩人)이 무슨 병법(兵法)이람!"

그렇다. 그것은 옳은 소리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겐 그것이 백 번 옳다. 그러나 목숨을 걸었던 그때의 나에겐 그렇지도 않았으니, 이 역시 '시중'(時中)이 아닐까?

우리는 박정희가 제일 괄시 못하는 쪽이 어디일까 생각했다. 첫째가 일본, 둘째가 미국, 셋째가 유럽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관한 한 유럽은 미국에 의해 여론이 만들어졌다.
이 역시 그 무렵 얘기다. 중요한 것은 일본과 미국의 여론이었다.

유신 이후, 김대중(金大中) 씨의 일본 망명 직후 일본과 미국과 유럽에서 남한계의 민단도 북한계의 조총련도 아닌 제3의 힘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 힘이 기성세대의 경우 한민통(韓民統)으로, 청년학생의 경우 한청동(韓靑同)으로 그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힘과 접촉하기 시작했으니. 만약 우리가 국내에서 반유신 투쟁을 전개했을 때 박정희가 우리에게 손을 대는 것은 곧바로 무리수를 범하는 것이 되며 전세계적인 반유신 노선의 포위망을 가동시키는 치명적 오류가 되게끔 하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가톨릭은 세계적으로 긴밀히 조직되고 체계화된 준국가조직이어서 이것을 건드리는 것은 바로 유신정권에 장기적으로는 자살을 뜻하게 될 것이었다.

국내에서만 보아도 가톨릭이 움직이면 개신교가 움직이고, 개신교가 움직이면 자유민주주의 단체나 개인들이 움직이며, 그렇게 될 경우 희망컨대 불교도 움직이고, 이어서 지식인과 기업들과 군 일부마저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다각적인 판단이 섰다. 산(算)을 놓을 때마다 매듭에 이르러서는 나는 이종찬(李鍾贊) 선배와 그 동료들을 꼭 생각했다.

만약 그림이 틀리게 그려진다 하더라도, 하나의 강력한 전선을 만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강렬한 전설 하나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층민중과 대중적 민중운동에 하나의 인화성 높은 촉발제 역할을 할 것이 분명했으니, 이 역시 장기적으로 보면 또 다시 반독재의 큰 파도를 일으킬 수 있는 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 무렵 지주교님은 자주 출국하시어 해외의 여러 사람과 접촉하고 있었다.
한청동 대표 20여 명이 어느 여름날 갑자기 입국하여 원주 교구청을 방문했다. 나는 그들 앞에서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그 장점은 다 함께 포용하고 동서양 사상을 통합하는 새 차원의 민중민족철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또 실천하라는 당부의 말을 했고, 또 그들로부터 바로 그것이 자기들의 활동과 생활의 목표라는 답사를 들었다. 이듬해 봄 내가 구속된 뒤 일본 내에서의 구명운동과 반유신운동 그리고 수백 회에 이르는 '진오귀' 공연의 주역들이 원주에서 그때 만난 바로 한청동, 그들이었다.

이 제3의 힘의 중심에 있었던 옛 몽양 선생 제자 한 분과 장선생님 사이의 아주 조심스러운 접촉이 그 무렵부터 시작되었고, 영주 형님은 자주 일본을 왕래하며 '오적(五賊)' 이후 긴 세월 동안의 김지하구명위원회(金芝河救命委員會)의 조직자이자 작품의 번역출판 책임자인 미야타 마리에(宮田毬榮) 여사와 교토(京都)대의 철학교수 쓰루미 순스케 준보(鶴見俊輔)선생, 도쿄(東京)대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선생 그리고 미술평론가 하리오 이치로(針生一郞) 님, 소설가 오타 마코토(小田實) 선생 및 소설가 오에 겐자브로(大江健三郞) 그룹들을 자주 만나 여러 가지 좋은 교류(交流)와 지원(支援)과 합의(合意)의 결과들을 가져오곤 했다.

그 무렵의 교우관계를 기억한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중에 미국인 농업학자 버나드 와이드맨과 독일 스파르타쿠스 회원이었다가 나치 수용소에서 죽은 부모를 항상 자부심을 지니고 기억하는 신문 잡지 프리랜서인 니콜라 가이거란 독일인 중년 여성이 있었다.

니콜라는 원주에 와 장선생과도 교분을 텄고 함석헌(咸錫憲) 선생과는 아주 절친해서 반유신투쟁이 한창일 때는 입국이 금지되는 위험인물 리스트에까지 올랐다.

지금도 나의 결혼사진에 니콜라와 함께 나의 오랜 친구인 홍콩의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노먼 솔피의 얼굴이 보여 감개무량하다.

그러나 그들 중 버나드 와이드맨이 가장 특이한 인물이었다. 한국 농업의 협업적 형태 연구가 주전공이고 매우 지성적인 그는 알고 보니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이었다.

그 외에도 몇 사람의 미국인 사업가들을 만나 일반적인 정치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역시 나중에 알아보니 CIA 요원이었다. 유신 이후 한국 내에는 CIA 요원이 득시글득시글했고 그 첩보·정보 활동 탓으로 버나드 와이드맨은 마침내 추방당했다.

나는 외신과의 인터뷰를 밥먹듯 해야 했다. 우리의 전통 사상과 예술, 그리고 지금의 우리의 처지와 희망을 알리기 위해서였지만 한편으로는 외국에서의 유명세가 만약의 경우 내 목숨을 담보한다는 전략적 판단에서이기도 했다.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해 일본·독일·스웨덴·프랑스의 그 숱한 언론들을 나는 지금에 와서 기억할 수조차 없다.

'대통령의 적'(敵·Enemy of the president)이란 호칭으로 나를 보도한 타임지의 도쿄특파원 S. 장과의 우정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의 미모의 부인과도 한번 같이 만났고, 또 한번은 재판 도중 문득 뒤돌아보니 S. 장이 방청석에 앉아 빙긋 미소지어 나를 격려해 주기도 했다. 석방 후에도 나를 찾았고 방일(訪日) 중에도 만났으니 참으로 길고 질긴 우정이었다.

살기 위한 곡예(曲芸)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정다운 사람들이었으니 과연 나의 이 인터뷰 홍수가 가진 깊은 뜻은 무엇이었을까? 탤런트? 정치인? 솔제니친? 코스모폴리탄?

분명한 것은 그때 그 무렵엔 그것이 나의 사활에 관계되고 운동의 성패에 직결된 꼭 필요한 것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에 와서는 단 한 마디 밖에 말할 것이 없으니….

"헛되고 헛되고 또한 헛되도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