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현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즈음 모두 함께 한 가지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 구조 안에서 그것을 조직적으로 극복하려는 운동은 특정한 경우 이외엔 대체로 순수한 동기의 일정 자본의 밑받침 없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이런 자본이 붙었을 때는 철저한 교육과 정신문화운동과 함께 현장의 조직활동이 마치 수레의 두 바퀴처럼 상호 보완을 이루어야만 타락 쇠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농민·어민·광산노동자와 도시영세민에 대한 각종 협동적 공동체 건설, 직접민주주의 체득, 각종 자활조직의 진행 등 현장은 활기를 띠고 있었고 본부 사무실은 불이 붙었다.
일꾼들이 현장에 나가지 않는 날은 교육과 보고회로 가득 채워졌다.
선전극이 어렵게 되자 우리는 곧 홍보영화 계획으로 나아갔다.
영화계쪽과의 교섭은 내가 맡았다. 그 무렵 쉬고 있던 이만희(李晩熙) 감독과 그 조연출들인 나의 친구 김원두와 백결팀이 그들이었다. 그 다큐멘터리 영화가 완성되어 시사하는 날 방안은 뜬금없이 킬킬거리는 웃음으로 가득 차버렸다.
어느 한 마을에서 그 마을 뒷산에 유난히 독사·살모사가 들끓었는데 마을회의에서 의논 결정하기를, 이 독사들을 잡아다 한 곳에 모아놓고 먹이를 주어 길러 나중에 뱀장사들에게 높은 값에 팔아 마을 소득을 올리기로 한 것이다. 우선 화면에 가득차서 꿈틀꿈틀대는 독사들의 모습이 징그럽기도 했지만 우리 중 누군가가 큰 소리로 어둠 속에서 떠들기를,
"저놈들을 몽땅 고속도로에 쏟아놓고 뒤에서 우우 몰아봐! 몰고는 어디로 가는가 하면 청와대로 가는 거야! 힛힛힛―."
정말 히트 발언이었다.
참으로 독사떼를 몰고 청와대로, 청와대로 진격하는 원주 사회개발팀 전원의 싱긋이 미소짓는 얼굴, 얼굴들이 마구 겹쳐 보였다. 그 누가 있어 감히 이 독사들에게 저항할 것인가? 경찰? 군대? 어림도 없었다.
영화는 그 밤에도 모닥불 주변에 모여 마을회의를 열고 있는 밤의 농민들, 고깃배 위에서 벌어지는 어민들의 토론 현장, 시커먼 막장에서 광산노동자 협동체의 구호를 연호하는 광부의 웃는 모습 등을 보여주었다.
나도 가끔은 현장에 따라 나섰다.
밤을 새우며 팥이 다섯 알, 콩이 일곱 알, 숟가락 세 개, 젓가락 아홉 개를 계산하며 떠들어대는 그들 속에서 운동의 현장적 직접성이 가진 아름다움과 감동을 맛보았다.
이튿날 새벽엔 밥 한 술 얻어 먹고 터덜터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우리들 발 밑에 뽀오얗게 일어나던 흙먼지, 아! 그 흙먼지에 비치는 붉은 햇살을, 그리고 길가의 이슬 맺힌 풀잎 위에 아롱거리는 흰 햇살을, 밝아오는 동편 하늘에 넓게 퍼지는 푸른 햇살을 지금 이 글을 쓰는 일산의 오피스텔 고층 방안에서조차 잊지 못해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한다.
캄캄한 유신(維新)의 암흑 속에서도 그같은 행복을 누리는 우리의 특권을 반드시 대중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돌려주는 그 과정이 그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 어둠의 절정에서 반유신(反維新) 투쟁이 기획, 조직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국민, 전민족, 전세계가 박정희 유신을 반대하게 하라."
이것이 장선생과 지주교와 영주(榮注) 형의 결단이었고 또 나의 결단이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