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7>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7>

원주의 나날들

매일 새벽 눈을 떴을 때 곁에 아내가 있다는 사실은 내게 기이할 정도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첫째, 안정감이었고 둘째, 겸손해야 된다는 생각이었고 셋째, 깊은 자기긍정이었다.

재해대책위원회, 훗날의 사회개발위원회와 교구기획실에서 나는 열심히 일했다. 행복했고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그와 정반대의 무겁고 괴로운 침통함이 더욱 깊어지고 더욱 넓어지고 있었다.

유신(維新)!
그야말로 '지극한 고통이 마음속에 있는데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至痛在心 日暮途遠)였으니 옛 시인 오장환(吳章煥)의 시에 왈,

'무거운 쇠사슬 끄으는 소리
내 마음의 뒤를 따르고
여기
쓸쓸한 자유는 곁에 있으나…'

그래, 쓸쓸한 자유!
그렇다.
쓸쓸한 자유였다.

아내는 이내 첫 아기를 가졌고 새 집의 귀퉁이 방 낮은 창 위의 흰 사기로 된 둥근 막사발 수반(水盤) 위엔 늘 이런저런 예쁜 꽃이파리들이 물에 떠서 그 화사함이 내 넋 위에 일렁일렁 그늘지고 있었다.

신혼의 자유 곁에서 나는 두 가지 일을 해야만 했었다.
하나는 민중 생존을 위한 광범위한 교육과 조직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차원을 달리하는 큰 정치적 저항의 물결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건국대의 김병태(金炳台) 교수와 이우재(李佑宰) 교수로부터 농업경제학과 협동론 등을 강의를 통해 배우고, 현장의 일을 보고회를 통해 자세히 듣고 토의 과정에서 개입하며,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은 농어민과 노동자·영세민의 계몽을 위한 선전 드라마를 쓰고 만드는 일이었다.

드라마 '진오귀'(鎭惡鬼)의 집필이 끝나고 연습이 시작되었다. '진오귀'는 '오구' 또는 '오구굿'이라고도 부르는 전통 농민굿인데 악귀(惡鬼)를 쫓아내는 내용이다.

그 양식을 확대하여 농촌 민주화와 협동화를 가로막는 안팎의 장애물과의 투쟁을 극장이 아닌 마당에서 탈춤 형태로 극화(劇化)하는 것이었다.

문화운동패의 아우들, 임진택(林鎭澤)·채희완·홍세화 등을 서울에서 불러내리고 원주의 연극인 장상순(張相淳) 선배 등과 힘을 합쳐 원주 단구동 교육원 마당에서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다.

극장이 아닌 마당이었다.
'투르기'(Turgie)가 아니라 '판'이었다.
장 루이 바로가 시도한 권투 링과 같은 사각형(四角形)도 아니고 브레히트식의 반원형(半圓形)이나 키노드라마도 아닌, 문자 그대로 살아 생동하는 원(圓), '마당' 그리고 '판'에서의 '굿' 또는 '극'이 시작된 것이다.

근대 리얼리즘극인 극장 연극은 관객의 일방적 시선을 고정시키는 '프로시니엄아치'로서 그 원형인 가톨릭의 미사 구조와 마찬가지로, 강단이나 무대 일방으로부터 관객 일반에게로 쏟아지는 카리스마의 감성적 독재와 이념이나 명제(命題)의 강제 세뇌(洗腦)에 꼭 알맞은 것이었다. 이 프로시니엄 극장에서 탈출하려는 유럽 연극의 몸부림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브레히트나 장 루이 바로의 연극들이다.

우리는 옛 탈춤들과,'원귀(寃鬼)마당쇠'나 '호질'(虎叱) '이놈 놀부야' 등을 계승하여 아예 마당에서 판을 벌이고 굿과 극을 놀고자 했다. 따라서 '마당'이라는 공간의 의미 구성과 '판'이라는 상황의 극적인 이해를 깊이 알고 가져야만 되었다.

그것은 임진택 아우처럼 일단 '아메바'로 볼 수는 있으나 '아메바'라 하더라도 그것은 생명체인지라 무엇인가 심각한 숨은 원리가 있을 것이다. 상황에 대한 철학적 인식이 전제되었을 것이었다.

내가 맨 먼저 착안한 것이 기왕에 탈춤에 형식화되어 있는 오방(五方), 오행(五行) 외에 음양 태극모양의 유동(流動)이었는데 훗날 감옥 안에서 문득 '생명'을 깨닫고 보니 공간 역시 배우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생명체이고, 생명체이므로 무대 공간은 기혈(氣穴)과 단전(丹田) 등으로 이루어진 심층(深層), 표층(表層)의 780여 개 혈처(穴處)의 대 경락계(經絡系)였던 것이다.

마당굿의 시간이 이미 선(線)적인 것이 아니고 알파와 오메가의 헤브루적 시종(始終)이나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아리스토텔레스·헬라적인 회귀(回歸) 또는 인도·중국적인 순환(巡還)이거나 근대유럽적인 상승(上昇)주의·진보주의적 역사주의의 일방적인 진행이 아니듯 공간 역시 살아 있는 경락계로서 혈처와 경락 등이 각각 제 이름과 제 나름의 기능 및 특징을 가진 미학적 지점들이었다. 곧 미학적 풍수학(風水學)이었다.

북을 울리고 장구를 치며, 때로는 날라리를 불며 굿거리 장단에 따라 춤을 추는 광대들이 자기가 서 있는 점이나 움직이는 선이나 영향을 미치는 영역 안에서 그 점·선·영역이 본디 가지고 있는 미학적 의미나 기능과 함께 드라마 및 그 캐릭터가 요구하는 내용을 결합하여 표현하는 것이 오래 되면서도 새로운 연출법이요, 그것이 다시 자기 육체의 경락계를 통과하는 의미화 과정이 또한 새로운 그리고 근원적인 마당굿, 극의 연기술인 것이었다.

선도(仙道) 서적인 '삼동계'(參同契)에는 또한 주역의 괘효사(卦爻辭)와 경락계를 일치시키는 독특한 그리고 진정한 육체론(肉體論)이 실려 있다. 이것은 나를 아주 커다란 결정적인 민족미학, 민중미학, 동양의 새로운 대중미학에로 이끌었다. 즉, 드라마의 이념 지배, 희곡 지배로부터의 탈출인 셈이었다.

우선 탈춤이나 굿의 열두거리, 열두마당의 틀 자체가 기승전결이나 헬라적 극예술론과는 촌수가 멀다. 구태여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구성에 조금 가깝다. 토막토막 끊어지면서도 그 토막들 나름의 전체적인 어떤 근본 촉매가 숨어 움직이는 것, 중심 아닌 중심이라 할까? 유동적 중심이라 할까? 그것은 차라리 들뢰즈와 가타리가 '카오스모스' 또는 '카오스모시스'라고 명명한 '혼돈의 양식'이다.
이것이 뒷날 임진택·채희완 등에 의해 구체화된 민족극운동, 즉 '마당극 또는 마당굿' 운동의 효시(嚆矢)였다.

그러나 이 '진오귀' 연습은 안팎의 사정에 의해 곧 중지되었고 그 겨울 박형규(朴炯圭) 목사님의 제일교회에서 임진택 아우에 의해 '청산별곡'이란 제목으로 공연되었다. 그리고 나의 구속 이후 재일교포 청년학생들에 의해 수백 회의 공연으로 일본열도 전체를 순회하는 새로운 연극으로 나타나 그 맥이 이어졌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