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에서 돌아온 내게,
그 해 맵디매운 매화꽃 2월은 바로 약혼이었다. 명동성당 근처에서였다.
약혼식을 위해 조선옷으로 갈아 입고 이발소에 가 이발을 했다.
거울에 비친 나의 서른 세 살.
그 위에 미당(未堂)의 싯귀 몇 줄이 어른거렸다.
흰 모시옷 갈아입고 난 마음
이끼 낀 성벽에 기대어서면
사뭇 숫스러워지는 생각, 옛 고구려에 사는 듯
샤를 보들레르처럼
설고 괴로운 서울 여자를
이젠 아조 잊어버려
아, 나는 잘못 살았구나.
별 생겨나듯
돌아오는 사투리.
저녁하늘에 별 생겨나듯 돌아오는 사투리….
한 '끝'.
한 '마지막'.
이제 사투리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투리처럼 산다는 것.
각오해야만 되었고 결단해야만 되었다.
서울여자 같은 부산한 흐름에 휩쓸리면서도 끊임없이 고즈넉한 사투리처럼 살고자 단안을 내리는 것. 견인(堅忍)이었다.
물었다.
"각오할 수 있겠소? 고생이 심할 텐데…."
대답했다.
"그만한 각오가 없을까봐서요?"
물었다.
"때론 아주 오랜 이별이 있을 수도…."
대답했다.
"어차피 편안하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아요."
유신헌법 공포 직후다.
장모님이 며칠만 숨어 있게 해달라는 나의 간청을 거절했을 때 아내는 자기의 그 좋다는 운수를 반 쪼개어 나에게 주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어느 날 원주 가톨릭센터에서다.
밥을 함께 먹고 겨울 길가에 나서서 매운 서북쪽 바람에 휩싸였을 때 아내는 내게서 공사가 중단된 한 커다란 건물의 골조(骨組)를 보았다고 한다.
왜 중단된 것일까?
왜 중단된 것일까?
모로 누운 돌부처?
거기에 자기의 운(運) 반쪽을 떼어 붙여 준다?
바람이 들며나는 신축공사장의 휑뎅그레한 그 골조와 그 골조 위에 어울리지도 않게 문득 와 앉아 지저귀는 노오란 새 한 마리, 내가 약혼식장에 들어가던 때의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아내 편엔 장모님과 그쪽 친척 젊은이 한 사람, 그리고 '현대문학' 편집장 김수명(金洙鳴) 씨가 와 있고, 내 편엔 어머니와 지주교님, 리영희 선생과 윤배 형님, 박현채 형님과 김이준 선배가 와 있었다.
지주교님이 한 말씀 하셨다.
어떤 각오, 어떤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자리가 이상스레 썰렁했다.
나는 내 마음 위에 자꾸만 칼을 내리며 술을 많이 많이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지금도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흰 윗도리며 푸른 조끼 위에 얼굴이 새빨간 한 못난이가 술에 취해 눈을 반쯤 감고 있는 모습이 별로 깍듯해 보이지 않는다.
하얀 바탕 위에 새파랗고 새빨간 것.
그것이 무엇일까?
천지비(天地比)인가?
지천태(地天泰)인가?
화수미제(火水未濟)인가?
수화기제(水火旣濟)인가?
모로 누운 돌부처?
모로 누운 태극?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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