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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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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1>

회귀(回歸)

몇 발자욱에 한 번씩 기침이 터졌다. 쿨룩거리며 쿨룩거리며 가래를 뱉고 또 가래를 뱉고 숨을 크게 내쉬며 쉬며, 원주 집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두 가지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박경리 선생과 따님이 집에 와 계셨던 것이다. 나를 그냥 떠나보낸 게 마음에 걸려 일부러 어려운 걸음을 뗀 것이었다. 나는 또 한번 이 인연(因緣)을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의 아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다.'

여전했다. 내 내면의 소리는 똑같았다. 그러나 내 머리는 도리질쳤다. 나는 매골모루로 가야 한다. 그이를 불행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눈물이 났다. 그러나 마당에 나와 서 있을 때였다.

또 하나. 이종찬 선배의 긴급한 기별이 윤배형 쪽 사람을 통해 와 있었다.

"빨리 피신하라! 너를 잡으러 간다. 이번에는 김상현(金相賢)과 김옥두(金玉斗), 그리고 너, 셋을 보안사에서 반쯤 죽이기로 했다. 김대중은 일본에 머물러 있다. 망명(亡命)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더욱 불리(不利)하다. 병원에 장기입원하라! 아마도 저번에 있던 마산병원이 좋겠다. 공기관이니 신빙성이 높다. 부디 살아 남아라! 또 만나자!"

나는 박선생님과 따님의 따뜻한 정(情)만을 안고 그 길로 마산을 향해 떠났다. 여전히 쿨룩거리며 숨을 몰아쉬며 버스를 타고 또 기차를 갈아타고. 마산 가포에 도착하여 하마리아 씨를 찾았다. 그리고 거기 공소에 머물렀다. 마리아 씨는 내 사정을 듣고 대구 파티마 병원(病院)에 연락했다. 그곳은 가톨릭 병원이고 의사들을 여럿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대답은 거절이었다. 가포 병원장도 대답은 거절이었다.

곁에 가만히 앉아 담배만 뻑뻑 피우던 닥터 구가 한 마디,

"방지거(프란치스코)! 사진이나 한번 찍자고! 누가 알아? 기흉(氣胸)일런지도 …? 지금 기침하는 걸로 봐서는 가능성이 있어 …."

엑스레이를 찍었다. 그리고 결과를 기다렸다. 순간이 꼭 영겁같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하마리아 씨가 소리를 질렀다.

"아아! 예수님, 예수님!"

나도 내다보았다. 저편 방사선과 건물에서 엑스레이 사진 한 장을 허공에 치켜들고 닥터 구가

"살았다! 살았다!" 소리소리 지르며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기흉이었던 것이다. 사진은 좌우 폐가 모두 새하얗게 보였다. 마등령 1,300고지(高地)를 거의 맨발로 넘으면서 터져버린 것이었다.

기흉과 대각혈 환자는 어느 곳 어느 병원에서든 즉각 입원가료해 줘야 하는 것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나는 즉각 병실에 입원했고 닥터 구가 아닌 병원장이 직접 집도(執刀)하여 오른쪽 가슴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거기에 호스를 박고 호스로 폐포를 압박하고 있는 공기를 뽑아 침대밑 링거병으로 들어가도록 수술을 마쳤다.

그리고 나서 병원장은 중앙정보부 마산분실에 전화로 김아무개가 왔음을 알렸다. 분실장 김씨(金氏), 그는 비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이곳 마산 분실로 좌천된 사람이었다. 김씨가 조정관들을 거느리고 득달같이 달려왔다. 침대 주위는 핏빛과 피냄새로 가득했다.

김씨는 숨가빠하는 나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병원장에게 대강 내용을 듣고는 자리를 떴다. 문을 닫으면서,

"김시인! 빨리 일어나요! 너무 겁먹지 말어! 그게 다 그거지!"

그리고는 병원장에게 가로되,

"2층쯤에 전망 좋은 곳으로 옮기셔! 이 사람 잘 치료해야 돼요. 국가적 인물이니까!"

즉각 나는 2층 병실로 옮겨졌다. 아직 훤했다. '가고파'의 고향 내 고등학교 동기생 이수장(李水長) 형의 아버지이기도 한 이은상(李殷相) 선생의 고향 가포 앞바다 그 위에 안개가 내리기 시작했다.

연전(年前) 츠루미 선생에게 내가 말한 바다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 창밖의 바다는 아름답다. 특히 안개 낀 바다는 더욱 아름답다. 그러나 바다 속에 사는 생물(生物)들의 삶은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마찬가지로 안개가 걷힌 바다 위의 쓰레기들, 부표(浮漂)들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아마도 어느 날인가는 현재의 한국과 일본의 바다, 그 안개 낀 바다가 걷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그 추한 모습까지도 각오하고 우리는 바다에 접근해야 한다. 바다는 우리의 존재의 고향이니까."

이어 7·4남북선언 직후 나를 인터뷰한 일본 '슈칸 아사히'의 지문이 떠올랐다.

'이 말에 김지하의 얼굴은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네가 뭘 아느냐는 힐난이 담긴 표정이었다. 무슨 뜻일까?' '김지하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10월유신의 예상을 암시한 것이다. 병실 문이 사르르 열리고 친했던, 그리고 가톨릭 교우인 이혜영 간호원이 웃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녕!"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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