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집에서 끼어자고 잠에서 깬 나는 이른 아침 이종찬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겠습니까?"
"아직은 괜찮아! 그러나 피신하는 게 좋아! 어디 산에 가서 캠핑을 하거나 상황이 좀 더 나빠질 때는 병원에 장기입원도 좋은 방법이야! 이번에 만약 잡혀가면 좀 맞아야 할게야! 안 들어가는 게 제일 좋으니 집에 가지 말고 어디든지 떠나라고 …!"
나는 연극하는 아우들, 김석만(金錫滿)·유우근 등을 불러내 함께 택시를 대절해 타고 내설악(內雪嶽)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선 용대리로 향했다. 중간 중간의 군(軍) 초소들도 무사히 통과했다. 창밖은 붉은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붉음을 보며 어젯밤 한 작은 밤길의 곁에 있는 벽에 분필로 휘갈겨 쓴 낙서 한구절이 기억에 생생하게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 신통한 내용도 아닌 그 낙서가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 한 사회의 길고 긴 비명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민주주의 만세!'
그 뿐이다. 민주주의 만세!
그 흔해빠진 민주주의! 그 시들어빠진 민주주의! 하나마나한 소리로 변해 버린 닳고 닳은 말 민주주의! 바로 그 민주주의 만세라?
택시 속에서, 내 뇌리 속에서 한 편의 시가 계속계속 외쳐지고 있었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루라기 소리 문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참으로 그날 타는 목마름으로 내설악 백담사(百潭寺) 안쪽 계곡의 이종복(李宗馥) 선생네 산막(山幕) 귀퉁이 방으로 기어 들어간 나는 흉한 말로 하면 조금 '삥갔던' 모양이다.
횡설수설하며 방 밖에 내 친구 호랑이가 와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골짜기 저쪽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떠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30리나 되는 길고 긴 캄캄골짝을 아우들 맨 앞에 서서 거의 뛰듯이 걸어서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떨며 부서지는 한 오두막에 도착했다.
호랑이가 저 건너에 와 있다고 또 떠들기 시작했다. 밤에만 나타나는 야설악(夜雪嶽)이 보이기 시작한다고도 떠들었다. 좋게 말하자면 신끼(神氣)가 지핀 것이다.
희미한 달빛 속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유우근 아우가 '히히' 웃더니, 김석만 아우더러 나를 가리키며,
"야설본사! 히힛! 야설본사."
이랬다.
"무슨 뜻이야?"
물었더니 석만 아우가 대신 대답했다.
"밤설악산을 본 사나이라는 뜻이죠 뭐!"
"야설본사!"
이튿날 점심 후에도 똑같은 30리 골짜기를 들어갔다. 가다가 오른편에 있는 숲속의 작은 공터에서 공중으로 날기 위해 이제 막 한 열 걸음쯤을 껑충껑충 뜀뛰고 있는 커다란 독수리를 한 마리 보았다. 나는 그 때 뭔가 깨달았다.
"짐승도 멀리 날기 위해서는 금방 날지 않고 한참 동안 땅 위를 뛰어간다!"
한참 동안 뛴다!
그것은 참으로 생생한 지혜의 발견이었다. 한참을 뛰어가다 마침내 어떤 지점에 이르러 날아 오른다! 나는 지금 뛰지도 않고 날으려 들지 않는가! 온갖 잡것이 다 섞여 있고 갖은 신산고초(辛酸苦楚)가 다 들어있는 뜀질일 게다. 견뎌야 한다! 견딜 뿐 아니라 그 중에도 공부를 해야 한다! 책만이 공부가 아니다. 바로 저 독수리와 공터의 저 여백에서 실감과 함께 배우는 게 참 공부가 아니겠는가!
나는 서서히 제정신을 찾기 시작했다. 산막(山幕)에 머리가 긴 백인청년(白人靑年)이 하나 와 있었다. 그 친구가 불어대는 퉁소소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둑어둑한 저녁내내 불어대는데 잠깐 멈추는 동안 문득 앞개울의 여울물 소리가 마치 폭음처럼 크게 증폭되어 귀를 찢었다.
방안에는 촛불이 하나 타고 있었다. 어디로 새어 들어오는지 문풍지를 울리는 기인 바람 아래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백담사(百潭寺)계곡이다!
아아,
만해(万海) 스님!
밤하늘 가득찬 비구름 바람
산맥 모두 잠든 저기서 소리지르네
촛똥을 모아 가난하게 일군 불
아슴이 여위어 가는 곁에 있어 밤새워 소리지르네
옛 만해의 아픔
가슴속 타는 촛불의 아픔
바위에 때려 부서져
갈곳을 가러 스스로 끝없이 바위에 때려 부서져
저렇게 소리지르네 애태우네
여울이 밤엔 촛불이 나를 못살게 하네
백담사 한 귀퉁이 흙벽위에 피칠한
옛 옛 만해의 아픔
내일은 떠나
떠나 끝없이 여울따라 가리라
죽음으로 밖에는
기어이 스스로 죽음으로 밖에는
살 길이 없어 가리라
매골모루로 가리라
아아 타다 타다가
사그러져 없어지는 새빨간
새빨간 저 촛불의 아픔
'매골모루'는 이조(李朝)때 대역죄인(大逆罪人)을 육시(戮屍)하여 토막토막 나누어 각각 함경·평안·전라·경상 등 각 도(各道)의 남북단(南北端) '매골모루'란 곳에 매장한 역사에서 온 말이다.
그래. 내일은 나도 떠나 저 매골모루로 가리라! 촛불은 타고 내 마음도 타고 끊임없는 저 여울소리의 가르침도 타고 또 타서 바알갛게 사라져 갔다.
이튿날 아침 나는 얇은 운동화에 지팡이 하나 짚고 마등령(摩登嶺)을 오르기 시작했다. 내 뒤를 아우들이 말없이 따랐다. 외줄기 산길을 허덕이며 허덕이며 오르고 또 올랐다. 오직 내 귓전에, 내 머릿속에, 아니 내 가슴속에는 스스로 바위에 때려 부서지는 여울물 소리, 스스로 제 몸을 태워 빛을 발하는 촛불 타는 소리뿐!
오세암(五歲菴)을 지날 때는 더욱 비장해졌다. 나는 매월당(梅月堂)의 뒷길을 가는 것인가? 아니면 허균(許筠)의 뒷길을 가는 것인가?
숨이 턱에 가 닿고, 시커먼 고사목(枯死木)들이 등성이에 주욱 늘어서 있는 마등령 꼭대기에 우뚝 서서 동해(東海)를 바라본다. 내일 아침에는 정동진에서 일출(日出)을 보리라. 그리고 돌아가리라. 청강과 나의 벗들이 있는 원주, 내 싸움터로 돌아가리라!
백담사에서 속초(束草)까지 5시간 반(半)에 주파(走破)했다. 내 뒤를 따르던 젊은 아우들이 내 앞에서 쭈뼛쭈뼛하며 입을 다물었다.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날 밤 여관방에서 기침과 가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런 감각도 없었고 오직 보이는 것은 촛불, 들리는 것은 여울물 소리 뿐이었다.
정동진에서 이튿날 아침 일출을 보며 나는 아우들의 건강과 민족문화운동의 앞날을 위해 기원을 드렸다. 글을 쓰는 지금, 중동(中東)의 낯선 곳 밤거리에서 몇해 전 자살해 이 세상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유우근 아우의 모습이 떠오른다.
"야설본사."
이것이 그가 내게 준 마지막 부적이었다.
'야설본사' 무슨 백제 사람 이름 같기도 하고 백제에서 야마토(大和)로 건너간 도왜인(渡倭人)의 이름 같기도 하다. 예수 역(役)을 잘했던 유우근!
예수가 되어 돌아오너라, 유우근!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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