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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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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79>

정릉

내가 정릉의 처가집, 장모님 박경리 선생을 처음 뵌 것은 오적 사건과 비어 사건 사이의 어느 해 겨울밤이었다. '현대문학'의 김국태(金國泰) 형과 소설가 유현종(劉賢鍾) 씨가 동행했다. 그 동기는 술이 마시고 싶은데 돈은 없어, 김국태 형의 제안에 따라 한밤중에 정릉집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결국 맥주를 잔뜩 얻어먹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형편없는 실례(失禮)요, 결례(缺禮)여서 따님인 지금의 원보 엄마가 그때 불평한 것도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박선생님은 내게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문에서 헤어질 때 또 놀러오라고 하신 말씀을 두고 김국태형은 왈,

"허허 박선생님이 웬 일이셔? 보통 저러지 않으시는데 … 김형이 점수를 땄구먼 …."

그 뒤, 또 한밤중에 일본어판(日本語版) 나의 첫시집 '기인 어둠의 저편에'를 신문투입 구멍을 통해 문안으로 집어넣은 뒤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리고는 비어 사건으로 마산에 몇 달을 가 있었고, 7·4공동성명 무렵 서울로 돌아온 나는 며칠 뒤 정릉집으로 놀러 갔었다. 놀랍게도 모녀(母女)가 너무나 다정스럽게 대해주어 그 뒤로도 가끔 놀러 갔었다.

그러다 결정적인 날이 왔다. 10월 유신(維新), 그 유신헌법이 조목조목 발표되던 날이었다.

월간 '대화'지(誌) 응접실에서 당시 야당 당수인 유진산(柳珍山)과 박정희의 밀착을 호되게 공격하는 성토문을 쓰고 있던 나는 갑자기 발표된 유신에 놀라 창비의 백낙청(白樂晴) 씨에게 달려가 약간의 돈을 빌린 뒤 택시를 타고 국도로 원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항만과 도로와 공항 등이 모두 봉쇄되었다는 라디오 뉴스를 택시 안에서 들었다. 미아리 고개에서 뉴스를 듣고 원주행을 포기했다. 그 대신 정릉 박선생 댁으로 차를 돌렸다. 박선생께 부탁해서 며칠 간의 시간만 벌도록 하자!

그러나 나의 부탁을 들은 박선생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혼자 사는 집에 은신해 있다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자기가 어떻게 되겠느냐는 거였다. 사실이 그랬다. 나는 그 위험을 시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돌발사가 일어났다. 마침 직장인 문화재관리국에서 막 돌아온 아내가 박선생께 대든 것이다.

"갈 곳도 없고 위태로서 온 사람의 부탁을 어떻게 그리도 모질게 거절할 수 있는 거예요? 며칠만 묵어 가도록 허락하세요."

거듭 도리질을 치는 어머니와 거듭거듭 숨겨줄 것을 주장하는 딸 사이에 한참 동안 승강이가 벌어졌다. 나는 저으기 놀랐다. 그러나 즉시 일어서서 그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괜찮을 것입니다. 서울 시내에도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는 터덜터덜 정릉길을 내려오는데 뒤쫓아오는 다급한 발자욱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보니 아내였다.

"웬일로?"
"제가 정릉 입구까지, 택시 탈 데까지만 바래다 드릴게요."

택시가 올 때까지 둘이서 나란히 걸었다.

"미안합니다. 어머니를 용서하세요. 혼자 긴 세월을 어렵사리 살아오셔서 그래요. 이해해 주십시오. 미안합니다."

시커먼 정릉천 개골창 위에 걸린 돌다리 위에서였다. 저 안쪽에서 택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시내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 때 내 넋의 저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외침같은 것, 신음같은 소리를 들었다.

"이 사람이다."

빠안히 쳐다보고 있는 내 앞에 아내가 흔드는 손에 따라 택시가 와 멈췄다. 나는 택시를 타고 떠났다. 차 안에서 뒤창으로 돌아보니 아내는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부질없는 청혼(請婚)이나 지나가는 감정 같은 것과는 다른 그 어떤 고마움이 내 속에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따뜻한, 그리고 애틋하고 간곡한. 그것은 분명히 새로운 시작이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총통제 선포와 함께 찾아온 나의 새 삶이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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