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滎) 선생의 동생 이회영(李會榮) 선생의 손자로 유명한 이종찬 선배를 세 번 직접 만났다. 한 번은 채현국, 박윤배 형님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단 둘이 수유리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별장앞 잔디밭에서 장시간, 그리고 마지막은 김영삼정부 시절 롯데호텔에서 있었던 한 조찬모임에서 잠시 악수하고 헤어진 것이 전부다.
그 중에도 단 둘이 만났을 때가 생생히 기억에 떠오른다. 지금쯤이면 물리적 시간으로 보나 정치적 시간으로 보나 발설해도 괜찮고, 아니 괜찮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발설해야만 되는 그런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픽하고 웃을지도 모르나 그 무렵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다. 윤배 형의 제안으로 만난 것인데, 우리 두 사람은 그때 몇가지 합의(合意)를 본 것이 있다.
학생운동이나 민중운동은 이념 그 자체를 그대로 관철하려 들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상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 그 구상은 박윤배·청강 장일순·이종찬과 그 동료들 그리고 나와 내 동료들로 이루어지는 한 통합 세력에 의한다는 것. 지금의 운동은 결국 새로운 군부(軍府)의 효과적 쿠데타에 의해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 그 쿠데타의 준비는 우선 장일순과 이종찬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해 지도된다는 것. 대통령은 김대중(金大中) 씨를 세우되 책임지는 각료와 집권 세력의 3분의2는 반드시 우리 세력이 점거해야 한다는 것. 이종찬은 곧 송죽회(松竹會)의 믿을 만한 자기 동료 한 사람을 상시적 연락책으로 원주의 청강 장일순 선생에게 연결시킬 것. 쿠데타의 시기와 방법 등은 유동적이되 최종적으로는 바로 전술(前述)한 세력의 지도부에 의해 결정되며 그 전까지는 목숨을 걸고 그 기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물론 미국의 지지나 동맹국들의 문제, 북한이나 러시아·중국의 있을 수 있는 동향 등은 모두 이종찬 선배가 맡기로 하고 그 당시로서도 매우 고무적이며 또한 긍정적이라는 점 등이 추가되었다.
며칠 있다 장선생님께 이 사실이 보고되었고 바로 이틀 후엔가 이종찬 선배의 동료인 한 현역 중령이 사복 차림으로 장 선생의 봉산동 자택을 한밤중에 다녀갔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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