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강 선생과 지 주교님이 합의(合意)하여 나를 원주로 반이시키기로 했다. 주교관 밑에 마침 주교관 부지의 조그마한 기와집 한 채가 비어 있어 그 집을 사서 내게 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짐을 옮겨 친지들 집에 맡겨놓고 집을 더 크게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목포(木浦)의 그 언덕 위의 옛집 이후 처음으로 얻은 '우리집'이었다.
칸수를 늘리고 광을 지었으며 기와를 고쳐 얹고 벽을 하얗게 칠해 놓으니 영락 없는 '카사 비앙카' '언덕 위의 하얀 집'이었다.
우리 가족은 새로운 삶의 의욕으로 앙양되어 있었다. 나는 교구청의 기획실, 김영주(金榮注) 형님이 실장으로 있는 기획실의 기획위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그러나 역시 청강 선생과 지 주교님의 합의 사항이지만 나의 활동 범위는 원주에 한정되지 않고 서울에서 지내는 날이 오히려 더 많았다.
그러나 나는 실제에 있어서는 시골로 옮긴 것이다. 어느 날 고속버스로 원주에 내려가면서, 언젠가는 병원을 나온 직후 원주에 내려가 청강 선생과 함께 민중운동을 하리라던 그 때의 맹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공부하던 그들과 함께 살리라던 그 때의 맹세가 담긴 시 한 편이 그대로 현실로 변한 것을 기억해냈다.
잘있거라 잘있거라
은빛 반짝이는 낮은 구릉을 따라
움직이는 숲그늘 춤추는 꽃들을 따라
멀어져가는 도시여
피투성이 내 청춘을 묻고 온 도시
잘있거라
낮게 기운 판잣집
무너져 앉은 울타리마다
바람은 끝없이 펄럭거린다.
황토에 찢긴 햇살들이 소리지른다.
그 무엇으로도 부실 수 없는 침묵이
가득찬 저 외침들을 짓누르고
가슴엔 나직이 타는 통곡
닳아빠진 작업복속에 구겨진 육신속에 나직이 타는
이 오래고 오랜 통곡
끌 수 없는 통곡
잊음도 죽음도 끌 수 없는 이 설움의 새파란 불길
하루도 술 없이는 잠들 수 없었고
하루도 싸움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삶은 수치였다 모멸이었다 죽을 수도 없었다
남김없이 불사르고 떠나갈 대륙마저 없었다
외치고 외치고
짓밟히고 짓밟히고
마지막 남은 한줌의
청춘의 자랑마저 갈래갈래 찢기고
아편을 찔리운채
무거운 낙인아래 이윽고 잠들었다
눈빛마저 애잔한 양떼로 바뀌었다
고개를 숙여내 초라한 그림자에 이별을 고하고
눈을 들어 이제는 차라리 낯선 곳
마을과 숲과 시뻘건 대지를 눈물로 입맞춘다
온몸을 내던져 싸워야할 대지의 내일의
저 벌거벗은 고통들을 끌어안는다
미친 반역의 가슴 가득 가득히
안겨오는 고향이여
짙은, 짙은 흙냄새여
가슴 가득히
사랑하는 사람들아
아 가장 척박한 땅에
가장 의연히 버티어 선 사람들
이제 그들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금 피투성이 쓰라린 긴 세월을
굳게굳게 껴안으리라 잘 있거라
키 큰 미루나무 달리는 외줄기
눈부신 황톳길 따라 움직이는 숲그늘 따라
멀어져가는 도시여
잘있거라 잘있거라
나는 정신적으로 안정되었고 긴 호흡의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내가 중학을 다녔고 그 뒤로도 절반쯤은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원주에 내려와 거리를, 골목을, 논밭길을, 산길을 혼자 터덜터덜 걷거나 청강 선생과 함께 문막의 저수지나 봉산 너머 큰 연못에서 낚시질을 하며 붕어찌개에 소주를 들며 정치와 예술, 철학과 종교를 얘기한 저 빛나는 시간들이 때묻고 지친 나의 영혼을 새하얗게 닦아내어 속까지 투명하게 비치도록 만들어 주었다.
저녁 무렵 순간순간 변해가는 치악산의 산빛들, 그 오묘한 색채를 들린 듯 멍청하니 바라본 적도 많았다. 크게 넓힌 집안에 널찍한 내 방이 마련되었다. 불을 때고 뜨끈한 방구들에 등을 대고 누워 있으니 슬슬 잠이 오고 포근한 옛 꿈들이 되살아나고,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내 생애 처음으로 나를 깊이 사로잡았다.
결혼해야겠다는, 얼마 안 있어 또 다시, 아니 더욱 험상궂은 폭풍의 시절이 오리라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결혼해야겠다는 바로 그 생각이 나를 깊이 깊이 사로잡았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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