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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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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72>

김수환(金壽煥) 추기경(樞機卿)

정확한 기억은 없다. 다만 그때 공소에서 환자(患者)들을 위로하는 음악회가 열리고 그 자리에 김민기 아우와 가수(歌手) 양희은 씨가 초청되었다. '아침이슬' 등을 두 사람이 부르고 환자들은 합창(合唱)으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뒷자리의 입구(入口) 부근에 서 있던 내 곁에 누군가의 묵직한 기운이 가까이 와서 멈추었다. 고개를 돌린 나에게,
"김시인(金詩人)이지요?"

그분은 그러면서 갑자기 자기 목에 감긴 흰 로만칼라를 잡아떼었다.
"네."

추기경(樞機卿) 님이었다. 그날 밤 마산교구청(馬山敎區廳)에서 밤을 꼬박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추기경님이 나 못지 않은 야행성(夜行性)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걱정스러워! 우리까지 정부를 반대할 경우 큰 혼란이 오지 않을까 걱정스럽군! 어떻게 대답할텐가?"
"현정권은 강합니다. 건국 이래 최강의 정부올시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더욱 강하게 밀어 붙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북(南北)의 실질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서는 장기적이고 능력있는 통일의 새로운 주체가 요구됩니다. 만약 정권이 바뀐다면 통일이 그만큼 빨라질 것이고 그 주체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과 공적이 필요하며, 훈련을 통해 그 정세를 바꿀 수 있는 주동성(主動性)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결국 현 정권은 우리의 '스파링 파트너'인 셈이지요. 만약 혼란이 온다면, 그것은 정권 정도가 아닌 아주 커다란 문명적 차원에서 변화의 첫 시작이 될 겁니다."

잠시 창가에 서서 바깥의 불빛을 바라보던 추기경님이 한마디,
"자네는 머리가 좋은 건가, 아니면 공부를 많이 했나?"
"둘 다 아닙니다. 다만 있다면 나 아니라도 상황이 인간의 실존을 좌우하는 때가 있는 까닭입니다."

"말도 잘 하는군."

잠시 침묵을 지키시더니 다시금,
"나 자네에게 바라는 것이 있네. 한국의 '샤를르 뻬기'가 되어 주게. 그리고 가톨릭의 오적(五敵)도 좀 비판하고!"
"저는 정치상황에 너무 밀착해 있습니다. 저는 제 행동으로 시(詩)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추기경님은 내가 만나 본 내 위쪽의 어른 세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능변(能辨)과 고도로 세련된 지성(知性) 및 풍요한 감성(感性)을 가진 분이었다. 그 뒤로도 서울 외곽의 한 수도원에서 밤샘하며 길고 긴 대화를 나눈 적이 있거니와 한마디로 줄이라면 이렇게 표현하겠다.

'우리 생전(生前)에 이런 분과 함께 동시대를 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이다.'

아마 오늘날의 천주교의 융성과 국민으로부터의 깊은 신뢰는 지 주교님의 희생과 추기경님의 그 그윽한 품성과 지도력, 그리고 사제단의 용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조금 건방지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가톨릭의 오늘의 과제는 이제 동양 전통사상과의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보다 활기찬 역학(力學)관계, 이른바 환류(環流)와 생태학을 포함한 새로운 변혁 지향과의 탁월한 통전(統全)의 문제인 것 같다.

그 과제 해결의 머리에 지 주교님과 추기경님, 그리고 사제단의 뚜렷한 영상이 함께 서 있는 것이 아닐까.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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