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을, 그 밤을 잊을 수 없다.
지학순(池學淳) 님이 그 무렵 마산병원(馬山病院) 안에 있는 천주교 공소(公所)에 와서 미사를 집전한 뒤 침실에서 나와 함께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아주 중요한 중요한 한 가지 조직사업의 첫 발걸음을 내딛으신 것, 그것을 지금도 결코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질적인 민주화(民主化) 투쟁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그 투쟁 과정을 통해 과거의 낡은 이념, 낡은 조직이 아닌 새로운 뜻과 새로운 길을 여는 첫 시작이었기 때문에.
지학순 님은 여러 정황(情況)으로 보아 천주교가 정치문제에 대거 참여해야 대중투쟁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시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전국의 사제(司祭)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단합시켜야 한다는, 그래서 원주교구(原州敎區)의 신현봉(申鉉奉) 신부님으로 하여금 즉시 전국을 여행하도록 할 것이라는 아주 중요한 큰 발걸음을 내딛으셨다.
가포 앞바다의 저 짙은 안개 속에서 울리는 길고 긴 무적(霧笛)처럼, 그리고 어둠을 뚫고 빛나는 띄엄띄엄 켜진 저 어화(漁火)들처럼 그 결정, 그 발걸음은 이윽고 독재(獨裁)의 어둠을 걷고 새 시대의 여명을 동트게 하는 남상(濫觴)이었다.
신 신부님은 그날 이후 전국의 신부 열네 분을 묶어 우선 사제단(司祭團)을 구성했으나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가 민청학련때 지 주교님의 자발적 구속 수감을 계기로 하여 마침내 저 유명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커다란 횃불로 치열하게 타올랐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후 나와 벗들의 진정한 새 지향(志向)이 내면(內面)의 영성적 명상과 외면(外面)의 사회적 변혁을 통합하는 '요기-싸르'의 길로 심화(深化) 확대(擴大)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그 긴 인생(人生)에서 단지 몇 번만 실존(實存)한다. 그 날, 그 밤이 지난 뒤 이튿날 아침 병원 문을 나서며 잠시 들어보았던 주교님의 오른손은, 그 뒤에도 자주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꼭 마지막인 듯 내 뇌리에 깊이 인상되어져 있다. 지난 밤의 그 우레같은 결정을 모두 잊으신 것처럼 무심한 미소를 내게 보내시며….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투명한 순간을! 그리고 햇살에 빛나던 그 눈부신 은발(銀髮)을! 한마디로 말하자. 그것은 고귀(高貴)함이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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