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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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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9>

비어(蜚語)

철저한 가톨릭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인 구중서(具仲書) 선배가 편집하는 가톨릭 종합교양지 '창조'(創造)에서 원고청탁이 왔다. 가톨릭에서 경영하는 것이니만큼 '사상계'(思想界)와는 다를 줄 알았다.

그 무렵 자주 만나던 연세대의 김동길(金東吉) 교수 왈,

"아니, 내가 김시인이라면 대연각(大然閣)호텔 화재(火災)를 풍자시로 쓰겠어. 우리 나라 근대화의 모든 모순과 문제점을 전부 압축해 놓은 게 그 화재라! 나같으면 신나게 써보겠어…."

"그거 재미있겠네요."

이렇게 되었다.
'비어'(蜚語)는 '유언비어'(流言蜚語)의 뒷말이니 '메뚜기처럼 뛰는 말' 즉 '소문'이란 뜻이다. 예컨대 내가 정보부에 대고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소문에 의하면 이렇고 저렇고 그렇다'라고 하는 말이다.

비어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고관'(尻觀)으로 '엉덩이를 보라'의 뜻과 '높은 관리'를 말하는 뜻의 고관(高官)이다. 그 무렵의 대연각 대화재가 소재다. 두번째는 '소리 내력(來歷)'인데 시골에서 서울 올라와 돈벌려고 애쓰지만 잘 안되는 사람 '안도(安道)'의 억울한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저항을 그린 것이다. 세번째는 '육혈포(六穴砲) 숭배(崇拜)'인데 파시즘과 그리스도교의 치명적(致命的) 대결(對決)을 예상하는 이야기 시(詩)다. 이후락(李厚洛)이 정보부장 할 때다.

이게 그들의 비위를 건드렸다. 이종찬 선배로부터 기별이 있었다. 이번에 붙들리면 반 병신 될 거라고. 주간 김병도 신부와 편집장 구중서 선배가 붙들려가고 나는 수배되었다. 정보부원들이 내 주변을 마구 들쑤셨다. 그리고 연행해 가서 숨은 곳을 대라고 마구잡이로 고문했다.

왜 그랬을까. 작품 내용이 거슬린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오적(五敵)' 때처럼 사건이 확대되면, 그 무렵 그들이 준비하고 있던 남북회담(南北會談)에 막대한 지장이 생기는 도덕적 파탄을 우려한 것이었다. 남자고 여자고 선배고 후배고 간에 약 2백여명이 붙들려 가서 적게 혹은 크게 피해를 입었다.

나는 그때 이화여대 '새얼' 서클의 황소진(黃小眞)의 소개로 고시(考試)공부 한답시고 모래내에 방을 하나 얻어 들었다. 나머지 연락은 다 차단해 버리고 소진이 김동길 교수에게로 일방적(一方的) 연락만 취하고 있었다.

캄캄한 모래내. 별도 없는 모래의 갯가 캄캄한 암흑 속에 드문드문 서 있는 집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소진과 나는 말을 죽였다. 나는 잡히든 안 잡히든 끝끝내 나의 길, 문화를 통한 비판과 창조의 길을 가기로 다짐한 밤이었다.

그러던 그녀도 그 이튿날 붙잡혀 갔다. 오지 않으면 수상한 것이다. 하루를 넘겼다. 밤에도 오지 않자 나는 내일 아침 떠나리라 결단했다. 그런데 새벽에 소진을 앞세우고 정보부원들이 들이닥쳤다. 소진은 지하실에서 발가벗기고 위협과 구타를 당한 것이다. 하루 낮밤만 버티면 내가 분명 자리를 옮길 것으로 계산했다고 한다.

먼동이 틀 무렵 발가벗은 채 소진이 정보부에 이렇게 고했다고 한다.
"만약 김지하에게 조금이라도 손을 대면 내가 폭탄으로 정보부를 폭파하겠어. 약속해요! 손 안 댄다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내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나올 거요."

그러나 그것은 그의 신념이었다. 소진을 취조하던 백발(白髮)의 정보부원이 한 말이다.
"소름이 확 끼쳤어. 조그마한 젊은 애가 발가벗긴 채 눈을 새파랗게 뜨고 정보부를 폭파하겠다고 하니… 이상하게 소름이 끼치는 거야… 허허허…. "

그래서인지, 이미 작정된 것인지 나는 뺨 한 번 욕설 한 마디 맞거나 듣는 일 없이 취조받았다. 남북관계가 급피치를 올리고 있던 때라 또 하나의 솔제니친을 만들면 안 된다는 미(美) CIA의 충고와, 유명한 반공(反共) 검사 출신의 오제도(吳制道) 변호사가 나를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한다.

여하튼 그런 분위기여서 나도 부드럽게 순순히 대응했다. 그 속에서 어머니도 면회했다. 다시금 그들은 나를 마산에 있는 결핵 요양원에 입원, 그러니까 연금(軟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주위의 희생과 고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 마산으로 가기로 했다.

백발의 늙은 정보부원이 혼자 들어와 슬그머니 낮은 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안 남았어! 한 번만 더 해! 두고 봐! 자넨 이제 머지않아 신발에 흙 안 묻히고 살거야! 한 번만 더 해! 그리고 나서는 일절 아무 것도 하지마! 알았나? 허허허!"

마산 가포(架浦)의 국립결핵요양원. 그 입구에 정보부원이 앉아 있고 사방을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쳤으니 그야말로 '위리안치'였다. 바다는 푸르고 잔잔했다. 섬들이 빙 둘러있어 물은 항상 호수처럼 잔잔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이은상의 그 남쪽 바다가 바로 가포만(架浦灣)이다. 그 바다 바로 곁이 병원이었다. 아름다웠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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