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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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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67>

전학련(全學聯)

3선개헌(三選改憲) 반대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서울대 법대 출신의 조영래(趙英來)·장기표(張基杓)·이신범(李信範) 등이 주동이 되어 전국학생연합(全國學生聯合)을 탄생시키려 했던 명동 입구의 흥사단(興士團) 본부에 초대받아 갔더니 그 장소에 함석헌(咸錫憲) 선생님과 정수일(鄭秀一) 씨만 와 있고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소위 윤필용이란 자가 나타나던 시점인데 그의 탱크부대가 고려대학교 등에 진입하여 위수령을 발동하고 주동자인 세 사람을 체포 구속한 것이다. 세 사람과 연결된 학생 간부들이 모두 차단당한 빈 터에 초대받은 사람들만 덜렁 서 있게 된 것이다.

함선생님을 모시고 찻집에 가서 차를 대접하고 헤어졌지만 마음이 착잡했다. 조영래 아우는 소위 4인조 그룹의 기둥이었고 일꾼이었기 때문이다. 절실히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민통 이래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전학련(全學聯)을 조형네가 시도하다 구속된 것이다.

조영래는 그 뒤 2년 가까이 징역을 살게 되었다. 사법연수원에 다니던 조영래는 법조계에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석방되자마자 내 요청으로 민청학련(民靑學聯)의 자금책을 맡았다가 나와 연관된 학생들의 구속으로 피신해서 7년을 고생한 끝에 어찌어찌 가까스로 복권하여 연수원을 마치고 변호사를 개업했다. 변호사로서의 조영래의 빛나는 공적은 아마도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기억(記憶)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그 조영래 아우가 내곁에 없었다. 그의 공석(空席)은 매우 큰 손실(損失)을 가져왔다. 실제에 있어서 전선당은 엮어지지 않았다. 이미 원주시위 당시 주교관 귀빈실에서 만난 조영래 아우와 나는 전선당 이론(理論)의 첫 마디를 열었고, 이후 서울에서 만나 상당한 깊이까지 검토했었기 때문에 그가 없는 전선은 쓸쓸하고 적막(寂寞)했다.

한 사람의 있고 없음이 전체적인 운동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뼈저리게 감촉한 뒤 나는 사람의 가치를 다시 발견한 듯했다.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이 천지(天地)를 움직인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물론 천지의 뜻을 체현(體現)한 사람일 경우에 말이다.

조영래 아우가 다시 나타나기까지 나는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으니 문화운동(文化運動) 패거리들, 나의 아우들과 함께 '구리 이순신'과 '나폴레옹 코냑'을 연습만 했을 뿐, 학교당국의 금지로 공연하지 못하고 말았다.

오 윤(吳潤)이는 경주에 내려가 윤광주와 함께 전(塼) 굽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고 김민기는 공장에 들어가 일하고 있었다. 그 때 이미 김영동(金永東)·채희완(蔡熙完) 등이 내 주변에 등장할 때였지만 함께 만나 떠들거나 술 마시는 일 외에 실속 있는 행사는 거의 못하고 있었다.

가톨릭문화운동의 일환이었던 '금관의 예수'를 서강대학교 마당에서 연행(演行)할 때다. 그때 일본의 유명한 극작가요, 연출가이며 배우이기도 한 가라 쥬로(唐十郞·당십랑) 형이 극단(劇團) '상황'(狀況)과 함께 입국하여 누군가의 소개로 나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그와 나는 의기투합하여 그의 작품 '이도(二都) 이야기'를 '금관의 예수'와 함께 서강대 마당에서 연행하기로 합의했다. 참담했다. 그의 연극의 자유스러움과 개방성에 비교해 볼 때'금관의 예수'의 촌스러움이란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지경이었다. 뒷날 아우들도 모두 나와 같은 심경(心境)이었다고 얘기했다.

나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우리의 탈춤을 현대화(現代化)하는 방향. 그 방향에서 마당을 무대로 할 경우 가라 쥬로의 서구적(西歐的) 개방성을 도리어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 그밖의 연기술이나 연출 문제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올 것이라는 판단과, 그것을 실천하기로 결심이 확고히 섰다. 가라 쥬로 형이 내게, 우리에게, 이 민족에게 준 선물이었다.

후일 마산요양원에 연금되었을 때 나를 찾아왔고 또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내가 처음 일본에 갔을 때 나리타(成田) 공항까지 마중나온 가라 형은 그때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반도호텔의 그 방에서 내가 즉흥적으로 추었던 '문둥이춤'을 기억하며 떠올렸을 것이다.

그때 나는 문득 그와 일본인들의 개인적인 대인접물(待人接物)이 우리 민족보다 훨씬 자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도리어 나는 가라 형과 그때 그의 부인이었던 교포 여배우 이례선(李禮仙)의 듀엣춤이 잊히지 않는다.

극단 '상황'의 멤버들과 아우들의, 며칠에 걸친 우정(友情)과 담론은 우리의 민족문화운동에 큰 자극이 되고 자산까지 얹어주었다. 그 영향이 훗날 마당극인 '진오귀'(鎭惡鬼)로 나타났고 그 연극은 내가 구속돼 있는 동안 일본에 건너가 가라 쥬로의 제자인 교포 연출가 김수진(金守珍)까지 출연하게 되는 긴 인연의 실마리를 만들어 주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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