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밝은 사람들은 이미 이른 시기에 나의 작품이나 담론에 산업노동자 문제나 그 철학적 입장이 전무(全無)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서 '전무'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내가 노동자를 싫어하거나 이상스럽게 생각하거나 하는 따위 부자연(不自然)스런 사상을 지닌 것은 아니다.
다만 '이브 깔베' 신부가 그의 '마르크스에 관한 팡세'에서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일회성(一回性)'에의 동의(同意)나 첨단적 극좌운동(極左運動)의 실패(失敗)를 일찌감치 예감하는 데에서 온 태도다.
내가 그 대신 농민(農民)이나, 농민보다 도리어 '대중적 민중', 즉 잡계급적인 '언더클라스'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프롤레타리아를 세계혁명(世界革命)의 항구적인 주체(主體)로 보는 마르크스·엥겔스의 견해(見解)가 별로 정당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마르크시즘 연구에서 깔베 신부는 '프롤레타리아 일회성'으로 웅변했다.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세계혁명의 주체가 된다는 견해는 두 가지 면에서 온다. 하나는 세계가 자본주의적(資本主義的) 물질생산(物質生産)의 대폭 증대(大幅增大)에 의해 획기적으로 변화하는데 그 실질적 생산자(生産者)가 산업노동자라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노동자가 로마 시대나 다름없는 단순한 자식 생산자(子息生産者), 노예(奴隸)에 불과한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어 혁명의 주체로서의 도덕적(道德的)이면서 현실적(現實的) 조건을 다 갖추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반대할 생각이 내겐 없다. 그러나 세계의 획기적 변화는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쪽으로도 진행된다. 지구(地球) 생태계(生態系)의 비극적 파괴 오염과 자원(資源) 고갈, 그리고 집권(執權) 노동자(勞動者) 정치세력(政治勢力)의 부패와 나태로 인한 도덕성(道德性) 상실이 그것이다. 산업노동자가 노예로서 혁명적 주체의 도덕성을 견지하는 것은 노동노예인 시기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일회성'이다. 그리고 이제는 노동자가 그토록 자랑하고 자부(自負)하는 세계변혁(世界變革)의 실체인 산업생산(産業生産)이 지구 전체를 오염 파괴시키는 행위(行爲)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언더클라스', 즉 들뢰즈적인 개념인 잡계급(雜階級), 연합적인 '대중적 민중' 또는 '카오스 민중', 그가 포함하는 도덕성이나 비참이 자본주의적 물질 생산자나 노예로서의 전락만에 있지 않고 삶 자체나 욕망 자체, 주체(主體)와 타자(他者)의 분리(分離)와 같은 유사 이래(有史以來)의 변함없는 모순과 타락과 부패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산업노동자를 보는 관점은 노동조합(勞動組合)이나 노동당(勞動黨) 쪽의 견해가 아니라 민중론(民衆論)이나 생명론(生命論), 카오스 이론 쪽으로부터라는 말이지, 노동자를 우습게 본다던가 하는 따위 저급한 태도와는 인연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나의 견해와 입장이지, 그 계급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이 글의 도입부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달동네, 빈민지역(貧民地域) 출신이다. 그리고 생산계급적으로 보아 여기에도 속하고 저기에도 속하는 잡계급적 룸펜에 가깝고, 가난 자체가 내면화(內面化)되어 있는 소외(疎外)된 민중, 카오스 상태의 인간집단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들이 나 자신의 역사요, 내 마음 속의 민중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는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한 것, 그 자체를 개혁(改革)하고 변화(變化)시켜야만 내게는 겨우 쓸모가 있어지는 부분적 진리(眞理)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제 다가오고 있는 세계 혁명은 정치경제(政治經濟)적 하부구조적(下部構造的) 혁명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정치경제 양식(樣式)의 씨앗을 내부에 이미 간직하고 있는 문화의 대혁명(大革命)인 것이다. 즉 문학 예술과 역사와 철학의 거의 전면적인 대혁명인 것이다.
그 전조(前兆)가 이미 서구에서 6·8혁명으로, 성격의 차이는 있으나 그 지향(志向)만은 동일한 중국의 문화혁명(文化革命), 그리고 지금 사방에서 싹이 트고 있는 미학적(美學的) 의식혁명(意識革命), 미적(美的) 교육혁명(敎育革命)의 확산이다.
프리드리히 쉴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美的敎育)에 관한 서한'이 근래에 크게 재평가되는 것이나 폴란드에서 성(聖)프란치스코의 우주적, 생태적 영성(靈性)에 토대를 둔 사회주의, '프란치스칸 소셜리즘'이라는 화두(話頭)가 등장하는 것 또한 모두 다 이런 명제들과 연결된 것이라고 본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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