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5>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5>

오적(五賊)

사흘 동안이었다.
'오적'을 얼마 동안에 집필(執筆)했느냐는 끝없는 질문에'사흘'이라고 대답하면 모두 놀라거나 거짓말로 의심한다.
다시 말하지만 꼭 사흘이다.

이상한 것은 그 사흘 동안 어떤 영적 흥분이 나를 내내 사로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내가 잘 모르거나 확인해 보지도 않은 부패 사안들, 도둑질 방법들, 호화판 저택의 시설들이 단박에 그대로 떠올라 펜을 통해 곧바로 옮겨지면서 조금도 의심하거나 걱정함이 없었다는 사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그 정도 길이의 글을 쓰는 데에 소요되는 긴장과 피로감, 때로 권태감이나 착상의 변경들이 아예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은 도무지 무엇을 의미할까?

아무리 이성으로 따져보아도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신명'이라 불러 마음으로 지극히 모시는 것이다. 바로 그 '신명'이 내게 지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뒤 정보부에 붙들려가 확인도 안해보고 짐작으로 두들겨패거나 비아냥거린 부패·호화·사기·비리(非理) 등이, 조사받을 때에 큰 문제가 되었다.

취조관들이 모두 입을 모아
"우리가 가서 보고 확인한 뒤에 이것들이 네가 과장한 것이 사실일 때에는 너는 골로 간다. 엉! 반공법에 국가보안법에 간첩죄에 해당해! 알았어, 임마? 어디 보자!"

네 패거리가 동시에 동빙고동을 조사하러 떠났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운명(運命)에 맡기고 이미 체념과 포기의 상태였다.

그런데 이것은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일이더냐!
돌아온 네 패거리 조사팀이 한결같이 그 부패, 호화, 사기와 비리는 전혀 과장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놀라기는 그들보다 내가 더 놀랐다.
상상으로, 짐작으로, 신나게 장단 맞춰 읽어가며 부풀릴 대로 부풀린 그들의 호화비리가 몽땅 가시적 사실이라니!

나는 그때 참으로 큰 절망에 빠져버렸다.

아아!
이 사회는 어디로 가야 할까.

정말이다.
각설(却說)하고, 바로 그것. 육안(肉眼)으로 보지 않았는데도 이럴 것이라고 춤추듯 상상해 전개하는 주체, 바로 그것이 다름아닌 '신명'인 것이다. 그리고 '신명'은 신(神)의 능력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최고의 정체(精體), 최고의 능력인 것이다.

그 이후 민족전통예술에서 주장하는 미적 창조와 향수 체험의 주체로서의 '신명'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 찬성하게 되었다. 나의 '신명의 예술론' '신명의 미학(美學)'은 바로 '오적' 집필 과정의 저 아슬아슬한, 저 식은땀 나는 체험들 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
어떤 정보부 과장은 술 한잔 걸치고 들어와 가라사대,
"김지하는 애국자야, 애국자!
김지하는 천재야, 천재!"

또 어떤 간부는 살며시 구석자리로 데려다놓고 담뱃불을 붙여 주며
"미스터 김!
정부쪽에서 일 안해 보겠어?
여러 사람이 말이 일치하는 건데 지금 정부에는 당신같은 사람이 필요해!
어떤가?"

또 어떤 실장은 호기 있게
"김지하, 술 한 잔 마실까?
어이 여봐, 자네 요 앞에 가서 술하고 좋은 안주 좀 시켜와!"

별의별 희한한 일이 다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무래도 당신 나이에 쓸 수 있는 글로 안 보인다는 거야. 감식 전문가들 말이야.
너무 잘 썼고 한학(漢學)이 대단하다는 거야. 기분나빠하지 말고, 지금 여기 이 종이 위에 악명높은 남산(南山)에 들어와 있는 솔직한 심정(心情)을 시로 한번 써 봐! 어디! 제목은 '남산'이야!"

나는 대뜸 종이 위에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이라고 한줄 쓰고는 그 밑에 '약여도연명'(若如陶淵明)이라고 휘갈겨 써버렸다. 한자문법(漢詩文法)에 맞거나 틀리거나 내 알 바 아니었다. 그때는 그만큼 자신(自信)이 붙어 있었다.

내식으로 해석하면 그 뜻은 이렇다.
'이제 느긋하게 남산을 바라다보니
마치 내가 도연명(陶淵明)이라도 되는 듯!'

아마 문법이 틀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쓰는 나나 나를 의심하는 무식한 정보원들이나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였으니….

아니 도대체 '오적'이 뭐가 어렵다는 것인가. 유일하게 어려운 벽자(僻字)가 국회의원·장차관·장성·재벌·고급공무원 따위 '오적'의 이름자에 나오는데 나는 그 희귀한 한자(漢字)를 옥편(玉篇)을 찾아 썼으니 독자(讀者)도 옥편을 찾으면 될 것 아닌가.
옥편은 괜히 있는 것이던가.

그러나 이런 호사도 그때 뿐이었다.

정보부는 내가 폐결핵 병력(病歷)이 있었음을 알아내고는 마산(馬山) 결핵요양원에 무료입원시켜준다며 집에 가서 짐을 챙겨오라고 잠정 석방했다. 석방되자마자 나는 그 길로 도망쳐 사상계 부완혁(夫琓赫) 사장과 그때 사상계의 재정 지원자요, 신민당의 돈줄이었던 함태탄광의 김세영(金洗榮) 회장(會長)을 만나 당시 신민당 당수(黨首)였던 유진산(柳珍山)씨 명의로 서울대병원(病院)에 그날 저녁으로 입원(入院)해 버렸다.

내 목적은 내 몸뚱이를 볼모로 해서 박정희에 대한 야당(野黨)의 격렬한 반(反)부패투쟁을 촉발시키려 한 것이었다.

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박정권을 쓰러뜨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성공했나?

'오적' 사건이 국회(國會)에서 분쟁을 일으킬 때는 일시 성공하는 듯 보였다. 오랫동안 등원(登院)을 거부하던 신민당이 도둑촌의 호화 부패 비리와 표현자유(表現自由) 억압, 잡지(雜誌)의 명문(名門) 사상계의 탄압을 비판한다는 명목(名目)으로 사납게 등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감옥에 갇힌 뒤 100일만에 유진산은 박정희와 독대(獨對)해서 문제를 해소해 버리고 제 이름만 드날릴 뿐 아무 이익도 없는 타협에 이르고 만다.

나는 얻은 것이 있을까.
언뜻 보아 있다.
나도 진산과 다름없이 이름만 얻었을 뿐이다.

바이런의 시에
'하루 아침 깨어 보니 갑자기 유명해졌다'라는 구절이 있다던가'
나는 국내와 국외에 일약 초유명사(超有名士)가 되어 있었다.

그것 뿐인가.
아니,
내 주장을 한 번만 더 들어준다면 이렇게 강변하겠다.
민족문학운동의 첫 시작,
판소리의 현대화,
부패 비판을 시작하는 민중 주체의 민족통일 혁명세력의 합법적 전선 투쟁의 시작.

뭐 이런 것 아닐까.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