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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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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4>

나폴레옹 꼬냑

김영수의 '혈맥' 연출을 부탁받고 나는 소원했던 대로 전업적인 학생극 연출가의 첫 걸음을 떼었다.

'혈맥'은 정통 리얼리즘 연극이다. 따라서 등·퇴장만이 아니라 연기자들의 연기는 물론이고 무대미술·효과·조명까지도 극도의 세심한 배려를 요구했다. 그밖에 또 내 나름 민족 리얼리즘의 미학적 요구까지 충족시켜야 했으므로 나는 그때 무척 까다롭게 굴었다. 그리고 나의 전업(專業)의 첫 시작인 만큼 또한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너무 열심으로 몰두(沒頭)하다 보니 후배 학생 연기자들에게 무리한 연기를 요구하게 되고, 무대장치나 조명에서 내 스타일의 새로운 리얼리즘 기법(技法)으로 실험하다 보니 평면적인 사실성(寫實性)에 익숙한 스태프들에게 반발을 일으켰다.

하여튼 작품이 무대에는 올라갔고 결과는 좋았다. 좋을 수밖에 없었으니. 거듭거듭 지독한 연출 파시즘으로 들들 볶아 자동적으로 동작을 하고 술술 흐르듯 대사를 하게 된 것 때문이다.

그러나 조명에서의 클로즈업 기법 등을 자주 활용하는 문제 외에는 내 첫 구상과 안 맞았다. 지루한 사실주의로 기울었다.

진보적인 나의 후배 관객들이 환호했고, 환호한 주인공의 하나인, 서중석(徐仲錫) 교수의 부인이 된 어머니 역(役)의 민혜숙(閔惠淑)씨 등 서너 사람 외에는 그 열렬한 환호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미움으로 얼굴들이 다 싸늘했다.

그때서야 애당초 '혈맥'이라는 작품(作品)선택에서부터 잘못이 있었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혈맥' 따위 작품은 영화에서처럼 당시 사실주의 연기의 최고봉인 김승호(金勝鎬)씨 등과 같은 직업배우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의 새로운 민족 리얼리즘으로 나아가려면 새로운 작품이 필요했다. 탈춤의 '마당'이나 '판'에 대한 적극적 탐구와 함께 '틈'이 많고 환상이나 기타(其他) 실험성이 배합된 새로운 민족적 리얼리즘 작품을 써내야 한다는 필요를 절감했다.

그때 나는 이미 첫번째로는 당시 잡지 '사상계'(思想界) 편집장이던 친구 황활원(黃活元) 형으로부터, 두번째로는 동지(同誌)의 그 다음 편집장이었던 친구 김승균(金勝均) 형으로부터 멋진 정치시(政治詩) 한 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리대 연습장에 가던 길에 거리에서 사본 당시 야당 신민당(新民黨) 기관지인 '민주전선(民主戰線)' 지면에 아주 조그맣게 '동빙고동의 도둑촌(村)'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읽게 되었다.

그 무렵은 베트남 파병(派兵)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나 일본으로부터의 경제원조가 늘어나고 전쟁특수(戰爭特需)로 인한 엄청난 외화수입(外貸收入)으로 고위층(高位層)과 소수 재벌들이 떵떵거리기 시작했는데 고위층들이 남아도는 돈을 주체할 길이 없어 동빙고동 일대에 너도 나도 다투어 호화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그곳을 가리켜 주변 서민들이 '도둑촌'이라고 했다.
바로 그 기사였다.

언뜻 이 기사(記事)를 바로 사상계사(思想界社)가 바라는 한 편의 정치시(政治詩)·풍자시(諷刺詩)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어 형에게 가능한 한 더 자세한, 그러나 당시의 언론으로서는 별로 더 자세할 것도 없는 그 문자 그대로의 '도둑촌'을 판소리 스타일의 풍자적 서사시(敍事詩)형식으로 쓰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래 혈맥 직후 사흘 동안 밤낮으로 미아리 골방에 틀어박혀 내내 혼자 낄낄낄 웃어대면서 들입다 써갈긴 것이 곧 '오적'(五賊)이다. 그런데 '오적'을 사흘만에 다 써서 사상계 5월호 발표 예정으로 편집부에 넘긴 직후 바로 착수한 것이 '여자오적'(女子五賊)을 다룬 단막 코미디 '나폴레옹 꼬냑'이다.

이 드라마가 막 나오자 이화여대(梨花女大) 법정대학(法政大學)에서 봄 공연으로 작품 선택과 연출 부탁이 들어왔다. 내 구상대로 돼가는 것이었다.

먼저 나폴레옹 꼬냑의 드라마 대본을 프린트하게 하고는 이화여대 법정대로 오후마다 출근하기 시작했다. 의욕과 전망을 갖고, 그러나 이번에는 연출 파시즘을 훌훌 떨치고 좀 여유있고 너그러우며 유머가 넘치는 연출가로서.

웃느라고 정신 없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처음에는 연극이 이렇게 우스워도 되느냐고 걱정하는 상급반 여학생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혈맥' 못지 않게 '나폴레옹 꼬냑'의 코미디 역시 학생과 젊은이들에게는 어렵고 또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렸다. 연출을 계속하면서도 내 머리는 '원귀(怨鬼) 마당쇠'와 '호질(虎叱)', 그리고 '야, 이놈 놀부야!' 등의 탈춤, 민족극(民族劇)· 마당극 또는 마당굿의 미학적 틀들이 떠올라 쉽게 떠나지를 않았다.

그 때에 '오적'이 드디어 사상계에서 발표되었다.
'시를 쓰랴거든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로부터 시작해 '이런 행적이 백대에 인멸치 아니하고 인구에 회자하여 날같은 거지시인의 싯귀에까지 올라 길이길이 전해 오겄다. 허허허'로 끝난다.

문제는 '허허허'에 있다. '나는 한마디도 말을 안했다'와 같은 뜻이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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