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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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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3>

등단(登壇)

나는 고등학교때 문학을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시를 쓰고 졸업한 뒤에도 썼다.

늘 써왔지만 웬일인지 전업적(專業的)인 시인(詩人)이 되리라는 생각은 한번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고였다.

그런데 학생시절에는 순전히 조동일 학형 때문에 6~7편을 조형 편으로 '창비'(創批·창작과 비평)에 보냈다가 퇴짜맞은 이후 시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자그마한 생각이나마 아예 접어버렸다.

나는 끝내 아웃사이더로 살다 가려 한 것이다. 정규적 직업이나 정치사상 조직에도 들어가지 않는 혁명적 지식인, 떠돌이 교사(敎師)로 살다 가리라 했다. 시는 그저 옛 선비들이 한시(漢詩)나 시조(時調)를 하듯 그렇게 즐기다 남아도 좋고 안 남아도 상관없고…. 참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점(点)이 오영수 선생에 의해 윤이 앞에서 날카롭게 지적되고 아프게 질타당한 것이다. 나는 그 소식에 당황감과 혼란에 빠져 독한 술을 매일 마시면서 거리를 방황했다. 누구와 의논할 사안도 아닌 것이기에 내 입은 꼭 닫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몇개월후 '폰트라'모임에서다.
모임에 오선배의 그림 후배인 한 여자가 그 무렵 가끔 참가했는데 미인은 아니지만 어지간히 면추(免醜)하고, 콩쥐는 아니지만 웬만큼은 심덕(心德)이 좋은 사람이었다.

염무웅(廉武雄) 형이었을 것이다.
술이 거나해서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인데 장가를 못간다고. 가만히 보니 오선배의 그림 후배인 바로 그 여자가 나이도 맞고 좋을 듯한데 어디 한번 오선배가 중매를 서보라고 농담반 진담반 지껄였다. 나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로웠으니까.

그런데 중매를 부탁받은 오선배가 술 때문이었는지, 지난 현실동인 때 윤이가 당한 아픔이 억울하고 분해서였는지 한마디로 뱉어버리는데 왈,
"김지하가 무슨 사회적 지위가 있나…?"

사회적 지위?
합법적인 인사이더로서의 직업(職業)같은 것? 예컨대 추천받고 등단(登壇)한 시인 같은 것?
그런 것?

아아, 내가 저렇게 생각되고 있구나!
모멸감과 참괴감이 엄습했다. 사람 사는 이치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나는 그날밤 잠을 설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황톳길'과 함께 서너편의 서정시를 원고지에 정서(淨書)한 뒤 문리대 불문과 조교실로 김현을 찾아갔다. 조연현(趙演鉉)이니 서정주(徐廷柱)니 그 무슨 기성 문학지의 케케묵은 추천 제도나 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하지 않고 직접 진출할 수 없겠는가 물었다.

두 가지 대답이었다.
자기는 시의 내용을 잘 모르겠지만 '황톳길' 등의 형식이 철저한 민요풍(民謠風)을 타고 있어 그 점에 미덕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과 이런 시라면 시인(詩人) 조태일(趙泰一)이 운영하는 시 전문지(詩專門誌) '시인'(詩人)을 통해 등단(登壇)하는게 좋겠다고, 자기가 조시인(趙詩人)에게 추천해 주겠으니 염려말고 청진동(淸進洞)에 있는 사무실에 원고를 갖다 주라고….

그랬다.
그래 그날로 나는 조태일 시인을 만났고 원고를 읽어본 뒤 내게 새삼 더운 악수를 청하며 곧 싣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그냥 '지하'로 그 다음에는 '김지하'라는 필명(筆名)으로 '황톳길' 외 몇 편과 '호박' 외 몇 편을 두 번 연거푸 게재해 광주(光州)의 김준태(金準泰) 시인과 나란히 드디어 대한민국의 한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그러매 생각컨대 김현도 김현이지만 조태일 시인은 내게 있어 한 사람의 대장이다. 그가 나를 등단시켰으니….

소위 민족문학파(民族文學派)의 그 흔한 등단(登壇)코스인 '창비'나 소위 서구문학파(西歐文學派)인 '문지'(文知·문학과 지성)를 통하지 않고 '시인'을 통해 등단(登壇)했다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그런 분들은 조시인 사후(死後), 지금 추진되고 있는 '시인'지(誌) 복간(復刊) 운동을 지원해 주기 바란다.

우리나라처럼 세계에서 유일(唯一)하게 시인이 많고 시인 지망생이 많은 이 이상스러운 문화맥락(文化脈絡)에서 시 전문지 '시인'의 복간은 그 의미가 심히 클 것으로 짐작된다.

1969년 4월과 그후 몇 달 있다 두번째로, 4·19가 10년이 지난 뒤 스물아홉 살로 나는 문단의 한 귀퉁이에 끼어들어 시인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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