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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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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2>

현실동인선언

오윤·임세택·오경환·강명희.

이 네사람으로 구성된 '현실동인'(現實同人)의 그 '선언'(宣言)은 사실 서구적 미학 개념으로서의 리얼리즘 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혹시는 멕시코 리얼리즘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무렵 젊은 우리에게는 하나의 촛불이었다.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 선생의 '우리나라 옛그림' 중 정조년간(正祖年間)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와 겸재(謙齋) 정선(鄭敾)·혜원(惠園) 신윤복(申潤福)등의 속화(俗畵)와 사실정신(寫實精神) 그리고 다양한 민화(民畵)에 대한 폭넓은 관심의 자극에 대한 창조적 반응(反應)이었다.

그것은 한 담론으로서 '폰트라'로부터 자연스럽게 싹텄다. '정조년간의 속화'와 진경산수(眞景山水), 그리고 민화에 대한 관심은 리얼리즘, 사회적(社會的) 리얼리즘 미학에 새로운 수정(修正)을 가하면서 멕시코 리얼리즘을 한 본보기로 삼아 이른바 '민족리얼리즘'으로 차츰 떠오르기 시작했다.

네 사람과 나, 그리고 김윤수 형님은 그 무렵 아마도 거의 매일 만났을 것이다. 만나서 갖가지 구체적인 미술 기법과 기본정신 등의 디테일 속에 숨어 있는 기왕의 문제점들, 새로운 개척방향, 그리고 그 창조적 지향점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내놓고 끊임없이 토론했다.

그리고는 어느날 갑자기 나의 종암동 골목골목 저 구석에 숨겨진 우리 집 골방에 깊이 틀어박혀 버렸다.

꼭 닷새 동안 썼다.
시장한 듯 시장한 듯 미친 듯이 쓰고 또 허겁지겁 밥 떠넣듯 고치고 다시 목마른 사람 물 마시듯 또 다시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닷새 후 김윤수 형님의 교열(校閱)을 거쳤고 그 뒤 네 사람의 독회(讀會)도 거쳤다. 많이 수정한 것은 아니다. 사전(事前)에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 너무나 섬세한 데에까지 함께 다루고 같이 들어갔었기 때문이다.

그림은 그 전부터 이미 제작되기 시작했다.
임세택이네 안양 숲속의 별장이 작업장이었다. 우리는 또 그림을 따져 말하고 다시 고치는가 하면 아예 처음부터 새로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나와 우리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기량의 부족이었다. 멕시코의 시케이로스나 디에고 리베라·파체코·오로스코 등의 기법이 대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오윤과 임세택의 나이 스물하나, 스물둘 정도로는 무가내였다.

단원·혜원·겸재와 민화 등의 영향이 없다는 게 아니다. 그리고 비구상(非具象)이나 추상(抽象), 앙포르멜이나 슈르레알리즘이 전부 배제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선언문(宣言文)에서 제기한 미학적 문제들이 탁월하게 풀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나이에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만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아마도 네 사람의 이때의 작업(作業)이 그 조직도(組織度)로 보아 어쩌면 민족문화운동 전면에서 가장 첨단적(尖端的)이지 않았나 싶다. 전시(展示) 날짜를 결정하고 장소까지 다 마련되어 포스터를 붙이고 선언문을 인쇄해서 돌리기 시작했다.

나도 윤수 형님도 탄압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문학이나 연극이라면 모를까 미술 같이 극소수의 동호인(同好人) 중심으로 진행되는 행사에 관변측(官邊側)이 그런 형태로 끼여든 일을 최근에는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단이 났다.
포스터를 붙이고 선언문을 돌리던 오경환이 서울대 미대 학생과와 교수실에 불려 간 것이다.

교수들은 선언문 내용보다 도록(圖錄)에 있는 여러 점의 그림들이 북한 그림이나 동구(東歐) 그림과 똑같다고, 반체제(反體制)요, 반미술적(反美術的)이라고 야단 야단, 흥분한 나머지 네 사람의 부모에게 전화로 큰 불상사(不祥事)나 난 듯이 떠들어대고 중앙정보부에 그대로 찔러 버린 것이다. 강명희를 제외한 세 사람이 붙들려가 중앙정보부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훈방되었고 그림들은 모두 붙잡혀 실려갔다.

중앙정보부측은 워낙 그림이라 그랬겠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시끄러운 것은 도리어 학교와 부모들이었다.

집집마다 되돌아온 그림들을 앞에 놓고 부모들과의 일대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임세택과 오경환은 대충 오윤과 나에게 그 근원을 돌리고 그림을 모두 폐기처분하는 조건으로 그럭저럭 넘어갔으나 막상 주모자(主謀者)인 오윤의 집에서는 시끄러웠다.

오선배로부터 며칠 후 들은 얘기다.
윤이 아버지인 소설가 오영수(吳永壽)선생 왈

"일제(日帝) 때에도 있었지만 해방 직후에는 그런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자기는 전혀 앞에 안 나서고 후배들 중 만만하고 재주 있는 놈들을 골라 매일 데리고 다니며 술 사주고 밥 사주면서 좌익 세뇌를 해가지고 일단 과격한 행동을 저지르게 해 놓고는 저만 뒤로 싹 빠져버리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 지금 너를 가르치고 있는 지하라는 자가 꼭 그런 자인 듯하다. 관계를 끊고 새 출발 해라!"

오선생(吳先生)의 추달은 엄격했다고 한다.
단 한번도 아버지를 거역한 적이 없는 착한 아들 윤이었다고 한다.

그 윤이가 대답했다.
"아버지도 예술가고 나도 예술가요. 각각의 예술가에게는 자기 예술과 자기 생활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 사람을 존경합니다. 만약 그것을 간섭하겠다면 나는 내 예술을 포기합니다. 예술이 없는 내 인생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선택하지요. 만족하십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일어서서 날카로운 작업도(作業刀)로 그림들을, 되돌아온 그 커다란 그림들, 100호에서 몇백호에 달하는 역작(力作)들인 저 모든 그림들, 아마도 우리 역사상 혁명적인 미술사가 집필된다면 숱한 그림들 가운데 참으로 조선적이면서 동시에 참으로 세계적인 새로운 그 리얼리즘으로 높이 평가될 그림들을 그 자리에서 몽땅 북북북 그어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아버지 오선생은 놀라 벌벌 떨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윤이는 아마도 고향인 언양 아니면 지리산으로 여행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현실동인전(展)'은 그렇게 '불발(不發) 쿠데타'로 끝나고 말았다. 작품도 다 사라져버렸다. 인쇄된 장문의 '현실동인선언'만 달랑 남았다. 그런데 달랑 남은 그 선언문이 그 몇년 후엔가 오윤의 재기(再起)와 함께 '현실과 발언'등 소위 민족미술운동의 첫 불씨 노릇을 하게 된다.

'씨알'이란 그런 것이다.
한 알의 불씨가 요원을 불태우는 법.

나의 윤이에게 명복을 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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