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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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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0>

마케팅

아버지의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더욱이 정밀한 회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혈압이 높아졌다. 나도 벌어야 했다. 나는 김정남(金正男) 형이 소개하는 마케팅회사에 '카피라이터'로 정남 형과 함께 취직했다. 사장은 '장만기'라는 젊은 사람이었다.

마케팅에 관해 책도 읽고 토론도 했다. 요컨대 자본주의 교환시장의 새로운 차원이 시작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케팅이나 광고, 그것에 관한 아이디어나 콘텐츠에 관한 카피라이팅이었다.

내 눈을 거쳐간 것들은 대강 담배인삼공사의 버지니아 잎담배 선전 광고와 대한항공의 '당신은 대한항공에서 언제나 양반 대접을 받습니다'라는 큰 제목 아래 한국의 '양반'(兩班)에 대한 개념 설명이 붙어 있고 코쟁이가 큰 통영갓을 쓰고 앉아 있는 '대한항공'의 기내사진(機內寫眞)이 크게 확대되어 있었던 것.

나는 그때 그 무렵 미국 광고협회 회장의 연설문 가운데 오늘날의 광고와 마케팅에서는 그 콘텐츠에 관련해 '밥 딜런'같은 청춘의 상징(象徵)과 그 메시지 따위를 깊이 검토해야 한다는 한마디를 읽고 앞으로 기업은 문화운동까지 잠식할 것이고, 문화의 미학적 영향력을 상품 판매와 깊숙이 연결시키리라는 예감을 갖게 되었다.

역시 그곳은 내가 몸담고 있을 곳이 못되었다. 3개월조차 못되어 어느날 문득 사표를 쓰고 그만 홀홀히 나와 버렸다.

혼자 빈털터리로 걸으며 생각했다.
무얼 해야 하나? 최소한도의 벌이는 하면서 민족문화운동을 해야만 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각 대학교의 연극회나 연극 서클들의 공연 정보망을 친구나 후배들 사이에 만들고 거기에 따라 전업적(專業的)인 학생극 연출가가 된다면, 그 때에도 이미 상당 액수에 달하는 연출료를 받으며 동시에 대학생 연극 중심의 민족문화운동에 자연스레 손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아이디어였다.

내 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동숭동 대학가의 학림(學林)다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명동에서 동숭동까지의 꽤 먼 거리를 나는 조그만치의 피로감이나 권태감을 느낌이 없이 노래 부르듯 휘파람 부르듯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리하여 들르게 된 학림다방에서 문리대 연극반 후배들을 만나게 되었다.

연극 이야기가 나왔다.
곧 작품 선정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는데 비록 '원귀(怨鬼)마당쇠' '호질(虎叱)' '야, 이놈 놀부야!'의 선례(先例)가 있기는 하나 그것은 일부 민족예술에 눈뜬 청년들의 얘기고 아직 마당에서 저항감 없이 노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단계였으니 역시 시청각교실무대에서 정통 리얼리즘 연극을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뜸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김영수(金永壽)의 '혈맥'(血脈), 언젠가 영화화(映畵化)되기도 했던 정통 리얼리즘 작품을 추천했고, 연극반 후배들인 임진택(林振澤)과 강택구(姜澤九) 등이 작품 내용 이야기를 내게서 듣고는 다 좋다고 해서 아마 그 자리에서 봄학기 공연작품으로 그만 선정되었을 것이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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