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7>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7>

스테이션 러브

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원이 집무하거나 주재하는 방을 일러 '스테이션'이라고 한다. 나는 2년 반에서 3년 사이의 그 길고 지루한 시간에 두 사람의 간호원과 연애 아닌 연애를 한 일이 있다. 그래서 '스테이션 러브'라는 말을 써봤다.

그날의 담당 간호원이 그날 밤 스테이션에서 철야하며 응급환자에 대응하고 정해진 주사 시간에 주사를 놓기 때문에 그 간호원과 사귀려면 의사가 없는 밤시간에 스테이션에서 슬그머니 만나야 한다. 분명 연애는 아니었으나 연애 형식을 띤 그냥 그렇고 그런 데이트였다.

고자가 될 만큼 매사에 자신을 잃었던 나는 첫번째도, 두번째도 그 흔한 데이트를 하는 데에 먼저 결혼을 전제하는 지극한, 아니 과도한 성실성을 보였다. 나는 이미 나아가는 과정의 환자 아닌 환자였으니 그들이 나의 접근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입안의 침이 마르고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황홀해했다. 역시 병(病)이었다.

첫번째의 키 크고 아름답고 몸매 풍만한 양귀비, 양옥진(楊玉眞) 같은 간호원은 이름이 '옥'이었고, 두번째 만난 중국 한(漢) 고조(高祖)의 부인 비연(飛燕)을 닮은 '연'이는 가늘고 날씬한 몸매에 까만 눈썹과 붉은 입술을 가진 요염하면서도 매서운 간호원이었다.

밖에서는 숲속에서 소쩍새가 울고 바람이 오리나무숲을 스치는 '휘익―휙' 소리가 들렸다. 스테이션에 마주앉은 '옥'이는 뜨개질을 하며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는 사팔뜨기 괴짜 의사인 정선생(鄭先生)을 떠올렸다.
"미스터 김, 결혼하려면 간호원하고 해! 엑스레이를 보면 김형 병은 평생을 조심해야 할 병이야. 그러니 누군가 튼튼한, 잘 아는 사람이 곁에 있어 돌봐줘야 한다는 말이지! 내말 알아듣겠나?"

나는 몸이 나아가면서 오히려 더 겁을 먹고 있었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용감한 데 비해 병에서 이제 막 벗어난 사람은 대개 딱할 정도로 겁이 많은 법이다.

그래, 나는 겁을 먹고 있었다.
하얗고 통통하게 살진 '옥'의 손을 붙잡는 대신 내가 결혼을 약속한 것은 딱하게도 공포심 때문이었다. 한 인텔리의 구혼(求婚)과 진지한 결혼 약속에 그저 덤덤할 처녀는 아마 이 세상에는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약속했고 그리고 잠시 밖으로 나가 숲속 내시들의 무덤 사이에 앉아 여러 얘기들을 나눴다.

나는 그 무렵 유료(有料)에서 무료(無料)로 전환하기 위해 절차상(節次上) 잠시 퇴원(退院)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 시간에 맞춰 미아리의 한 제과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집에 온 나는 묘하게 이를 눈치챈 어머니의 방해로 약속을 어겨 1시간 이상이나 지각했다. '옥'은 없었고 그것으로 두 사람 사이는 깨끗하게 끝났다.

다시 무료병동(無料病棟)에 입원한 나와 마주친 그녀의 눈은 싸늘했다. 내시(內侍)들의 무덤앞 만력년간(萬曆年間)의 석비(石碑)들을 스쳐 지나가는 차가운 바람 같았다. 그리고 내가 완치되어 병원을 떠났을 때 그녀는 간호원 자격으로 독일로 떠났다. 그 뒤 어찌됐는지?

또 세월은 흘렀고 퇴원이 가까워 올 때 '연'을 만났다.
밤 스테이션에서였는데 몇차례 만나 얘기를 나눈 뒤 내가 결혼 운운하자 뜻밖에 그녀는 화를 벌컥 내며 긴 한숨을 쉬었다.

"나는 한 사랑이 익어가는 줄 알았어요. 로맨틱한 감정에 마음에 늘 달떴는데 당신이 그걸 깨뜨려 버렸어요. 참 멋대가리도 없지! 결혼이 다 뭐람!"
뒷날의 말이다.

퇴원하고도 만났다. 안양유원지에도 함께 갔고 수유리 오윤의 집에도 함께 갔으며 혜화동 로터리의 한 찻집에도 자주 들렀다. 그녀는 내가 성실하고 충실하게 대할수록 권태로워 했다. 시를 쓰는 예술가가 너무 멋이 없다면서 자기는, 재능은 있으나 가난한 한 예술가의 아내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까지 말했는데도 나의 그 시인(詩人)은 그 멋은 살아날 줄 몰랐다. 아니, 모르거나 잊은 것이 아니라 본디가 그런 멋과는 인연이 없는 촌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수유리, 쌍문동 오윤의 집에서였다. 윤이와 나란히 앉아 있는 내 앞 방바닥 오선배 곁에 비스듬히 누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또 그 무렵의 어느날 밤, 병원 기숙사에 별일 없나 묻는다고 전화를 하던 그녀가 고향에서 친구가 올라와 있다고 하며 가로되,
"운명이군요.
만나기 힘든 운명이군요!"
사뭇 가지고 놀던 것이다.

글쎄!
나는 정말 멋이 없나?

살까지 둥둥 쪄 별명이 '김일성'이가 되었을 때고 머리까지 스포츠 스타일로 치깎아 또 별명이 '유도선수'라고까지 불렸으니 무리도 아니다. 답답한 나는 그 무렵 자주 만나던 평론가 염무웅(廉武雄) 형에게 상의했다.

"어찌하면 좋겠어?"
"그럴 경우 왕년에 김승옥(金承鈺)이가 즐겨 쓰던 상투적인 문구(文句)를 한번 사용해 보지!"

그리고는 엽서의 초안을 써보였다.
하나의 엷은 시구(詩句)였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 차라리 너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 애썼다. 아, 너를 사랑하기가 왜 이리도 어려우냐? 운운(云云)….'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아무 약속이 없던 그녀가 사방으로 전화를 하고 혜화동 찻집에 나와 앉아 이미 염무웅에게 들어 다 알고 있는 예상대로 능청스럽게 피곤한 얼굴을 하고 걸어 들어와 털썩 주저앉는 나에게 슬픈 목소리로 나와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 오늘은 함께 밤을 지새우고 싶다고, 그렇게 속삭였다.

그렇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나미가 삼십리는 더 멀리 떨어졌다. 바쁜 일이 있어 나 먼저 간다 하고 만류하는 그녀를 뿌리치고 훌쩍 떠났다. 그리고는 잊어버렸다.

그리고 내 마음은 이미 불꽃 튀기는 그 무렵 그 법정 투쟁의 디테일에 가 머물러 있었다. 폐결핵쟁이 시인(詩人) 시절의 스테이션 러브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바보였고 사랑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그것.
남는 교훈은 그것 뿐이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