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역촌동 병원은 벌집 쑤신 듯했다.
총검을 든 군인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북으로부터 침투한 게릴라들을 이 잡듯 쥐 잡듯 소 잡듯 잡으러 다니는 난리를 떨었다.
내가 입원해 있던 제일 높은 언덕의 제5병동까지 올라와 샅샅이 뒤지고 두리번거렸다. 총소리가 북한산과 불광동쪽, 구파발쪽에서 계속 들려왔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사살당한 공비(共匪)와 무기들이 실렸는데, 그중 생포당한 '김신조'라는 젊은 게릴라가 있어 기자회견하는 기사가 나왔다.
"목표가 무엇인가?"
"청와대다."
"무얼 하러 왔는가?"
"박정희 목 따러 왔다."
"그래서 어떡하자는 건가?"
"남조선에서 미제를 몰아내고 남조선 인민을 해방하여 조국통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마치 비정한, 사람 같지 않은 기계나 인조인간 같은 무기질의 인상이고 발언이었다. 철통 같았다. 여기까지 움직인 내 기억 위에 지금은 병환중인 박창암(朴菖巖) 장군의 영상이 떠오른다.
김신조 충격이 전국, 전국민을 강타할 때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형욱인가 누군가가 시골의 한적한 농장에서 농사짓던 박(朴)장군을 찾아와 사정사정했다 한다. 반(反)게릴라 특수전략을 집행해 달라고.
"너희들이 알아서 해! 나는 몰라!"
몇번이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밉더라도 조국을 생각해 주십시오. 백척간두(百尺竿頭)입니다. 백척간두! 쟤들이 한 대에 두명씩 태워 글라이더 200대와 꼬마잠수정 100대만 내려보내 전국 각지의 주요 항만·산업시설과 군사·행정시설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그날로 쑥대밭입니다. 휴전선에서 정규전·진지전만 생각했지, 게릴라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무 대책도 없습니다. 대통령께서 큰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장군!"
그랬단다.
삼고초려(三顧草廬)가 고마워서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앞날이 걱정스러워 수락했단다.
박장군은 먼저 경찰 간부 전원을 모이라고 했다. 경찰간부학교 강당에 전원을 모아놓고 첫마디가
"나 원래 욕쟁이인데 욕해도 되느냐?"
대답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래, 첫마디가
"야, 이 개새끼들아!"
"……."
"이 새끼들아! 빨치산 막는답시고 국민을 괴롭히는 놈이 있다면 내가 먼저 잡아 죽이겠다. 각오 돼 있느냐?"
전원이 합창하듯
"네에―!"
그때부터 향토예비군이 조직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카운터 게릴라전(戰)의 금과옥조인 '인민(人民)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경찰의 맹세를 조건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란다.
놀라운 얘기였다.
나는 자칭 우익, 자칭 민족주의자, 자칭 단군의 자손 중에 이런 분이 있는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진짜'였다.
6·25때 마오쩌둥 전술을 활용해 단 한 사람도 살해하지 않고 수없이 많은 젊은 빨치산들을 귀순시켜 살려냈다는 이야기, 지금도 그들이 철철이 그리고 명절 때는 꼭 선물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찾아와 넙죽넙죽 인사를 한다는 이야기, 그와 반대로 당시 돈 얻어먹고 멀쩡한 놈을 병신으로 조작해 군대를 빠지게 한 장교들을 엄벌했다는 이야기….
나는 지난해 가을, 개천 주간에 지리산의 옛 격전지 '빗점'에서 좌우익 전몰자 천도제를 추진하던 중 현지의 노인들이 자기들의 은인(恩人)인 박장군을 초대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보았다.
놀라운 일이다.
그 숱한 가짜 애국자 홍수 속에 이런 이가 있었다니! 이 썩어 문드러진 나라가 그나마 유지되는 것은 이런 어른들 덕임을 새삼 깨닫고 마음이 푸근해졌다.
역시 몽양(蒙陽)의 제자다!
향토예비군이 굴러가는 것을 보고 박장군은 온갖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초야(草野)로 다시 돌아와 그 때부터 '단군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평화(平和)도 통일(統一)도 나라의 참다운 독립(獨立)도 국조(國祖)와 고조선(古朝鮮)을 역사적 실재로 확신하는 교육으로부터, 넋의 평화와 독립과 통일로부터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어른이다.
그러나 단군(檀君)도 고조선도 그저 우격다짐이나 국수주의(國粹主義)로써 증명되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국제적이며 과학적인 집단적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니 이 또한 더욱 놀랍고 놀라운 일이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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