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1>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1>

첫여름

매일 끊임없이 누워서 안정하다 보니 라디오가 친구였다. 낮이나 밤이나 뉴스 아니면 연속극. 그 무렵 한 연속극 주제가가 잊히지 않는다. 문주란의 목소리.

'꽃이파리 숙어지고
새잎새가 푸르르던
호젓한 오솔길에
훈풍은 분다아,
첫여름, 첫여름에
다시 만난 그 사람
그러나 흘러가는 흰구름
눈부심만 가엾어라'

김기팔 형의 연속극도 들었다. 제목이 '천재시대'. 계속 듣다 보니 주인공 '천재'의 모델이 바로 나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최근의 몇년간의 나였다. 불만은 있는 듯했으나 그렇게 나쁘게 보지만은 않은 듯.

다만 주인공 '천재'는 세상이 받아들이기 힘든, 상식 밖의 인간이란 점을 강조한 것 같다. 마지막에 '천재'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한 두 번의 옥살이와 현실참여 끝에 스스로 지쳐가게 만드는 서울을 결별하고 고향의 시골집으로 돌아가 촌색시에게 장가든다. 그날 밤,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에게 발바닥을 얻어맞는 행복한 장면으로 끝난다.

그 여름, 동백림 사건과 통일혁명당 사건 등 길고 긴 재판 뒤에 온 나라에 오기 시작한 그 의미심장한 침묵과 공허감의 무더운 여름.

그 여름에 '에밀리', 내가 짝사랑하던 그 첫사랑의 여인이 내게 면회왔다. 미국에서부터였다.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의 열기가 갑자기 식도록 만든 그녀의 옛 발언, 그 '구라파 거지론'에 이어 이번에는 두 번째로 그녀의 갑자기 '민족멸시론'이 작렬(炸熱)했다.

연극에 관한 무슨 얘기 끝에,
"브렉트 말이야? 브렉트?"

'브레히트'라고 부르는 내 발음에 제동을 걸면서 '브렉트'라고 강조하는 데서부터 검은 예감이 왔다.

"브렉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렉트, 브렉트 하는 한국 애들! 참 희극이야! 좀 알고 나서 떠들 일이지! 그리고 '민족 운운'하는 건 뭐야? 민족 같은 건 17세기 얘기야! 17세기! 무슨 얼빠진 민족 타령이야? 어저께 누굴 만났더니 탈춤이 어쩌고 판소리가 어쩌고 떠들던데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런 케케묵은 타령 나부랑이 가지고 무슨 브렉트 연극과 비교를 하는 거야?"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때는 정말 혐오감이 복받쳤는데 그뒤 곧 평정을 되찾은 나는 사랑이 되었건 증오가 되었건 감정의 격류에만은 그나마 휩쓸리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임을 느꼈다. 가는 길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녀를 미워하거나 멸시하지 않는다. 그런 지식인은 지금도 내 곁에, 서울 바닥과 지방 도시들에 숱하고 숱하며 또 그들이 바로 신세대를 교육하고 있는 바로 당사자들이니까!

그녀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코가 길쭉한 한 백인청년(白人靑年)을 약혼자라고 소개하던 훗날 훗날, 안톤 체호프의 '버찌농장'을 연출한다면서 도움을 구했을 때 웃으며 문화운동쪽의 내 아우들을 대거 동원해 출연하거나 스태프 일을 맡겨 도울 수 있었던 것도 그 무렵 내가 일시적으로나마 증오나 혐오감에 깊게 휩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이 다르다고 생각을 정리해 버렸던 까닭이다. 다르기 때문에 도울 수 있었다. 말하자면 더 이상 내 가슴에 소모적인 짝사랑은 없었기 때문에 흔연할 수 있었다는 말.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