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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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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0>

'기흉'(氣胸)이었다.

기흉은 기관지에 구멍이 뚫려 숨을 들이쉴 때 기관지를 통해 폐포와 늑막 사이에 공기가 들어차면서 그 판막문이 닫혀 숨을 내쉴 때 공기가 제대로 못나오는 것. 그래서 폐와 늑막 사이에 공기가 가득 차 숨이 가쁘고 심한 압박을 느끼다가 결국 질식해 죽는 병이다.

내 X-레이는 거의 하얗고, 검은 부분도 흰 선과 점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기흉이군!
지저분하군!
오래 걸리겠군!'

X- 레이는 폐(肺)의 호흡(呼吸)의 역사이니 그 폐(肺) 주인의 삶의 역사다. 기흉은 폭력적 삶의 증거요, 폐가 지저분한 것은 지저분한 삶의 자취고, 오래 걸리겠다는 것은 빨리 나빠지고 빨리 치료되는 '속립성'이 아니라 느리게 나빠지고 느리게 치유되는 '삼출성'이란 뜻이다. 제 성질을 따라가고 제 사람의 페턴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수술 대신 약물치료로 고치겠다는 의사의 결정이 내렸다. 아이나니 파스니 주사 등 약을 듬뿍듬뿍 먹어대니 차츰 기침도 줄고 피가래도 그쳤으며 숨도 덜 찼다. 종일 침대를 지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밥과 고기 반찬과 과일을 배터지게 먹어야 하고 잠을 잘 자야 한다는 거였다.

폐결핵은 영어로 '소모'(消耗·consumption)다. 그야말로 '소모'였다. 그러나 나는 '모순'(矛盾·contradiction)이라고 불렀다. 그야말로 '모순'이었다. 밥맛은 없는데 많이 먹어야 하고 온갖 생각이 다 출몰하는데 잠은 잘 자야 한다. 약은 먹으면 토하기 십상인데도 꼬박꼬박 그 많은 약을 다 먹어야 하고 소화도 안되는데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하며 우울증이 깊은 데도 명랑해야 한다. 맨날 쉬어야 하니 돈은 벌 수 없는데도 돈이 무척이나 많이 들고 비싼 약만이 좋은 치료제였다. 여자 생각이나 술 따위 딴 생각은 절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멀리할 수 있는 책은, 그것도 철학적이고 심각한 책은 읽지 말아야 한다.

폐결핵은 일종의 정신병, 장기적인 입원환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 병의 특징은 잠을 잘 못잔다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잡념이 많고 종일 누워 있어서 소위 '침대 휴식'(베드 레스트)을 해야 하니 낮에는 자고 밤에는 말똥말똥해 있는 게 오히려 정상이다.

내 옆방에 목사가 한 사람 입원해 있었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독특한 그의 발자욱 소리가 꼭 취침시간만 되면 들린다. 몇개월을 똑같은지라 한번은 슬그머니 뒤따라 가보았다. 옥상으로 올라간다. 옥상 귀퉁이 캄캄한 곳에 가 꿇어앉아 뭐라고 웅얼거리며 기도한다. 살금살금 다가가 뭐라고 기도하는지 가만히 엿들었다.

왈,
"하나님! 하나님!
잠을 주옵소서! 잠을 주옵소서!
부디 부디 잠을 자게 해주옵소서―!
아아아아메엔!"

예수쟁이 말이 나오니 또 이어지는 한 기억이 있다. 내 방에 지독한 예수쟁이 한 사람이 새로 들어왔다. 늘 숨을 헐떡이며 피를 뱉곤 하는 정강이라는 한 사람이 화장실에서 피가래를 뱉어 담는 '담통'을 부시는 걸 보던 그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마디 뱉었다.

"아아 저 고통! 회개해야지!"

순간 핏발 선 눈으로 그이를 보던 담통쟁이 정강씨가 담통속의 피가래를 그이 얼굴에 훽 뿌리며 외쳤다.

"아나 고통! 아나 회개!"

나는 내 침대 머리맡에 시화전(詩畵展)을 열었다. 그림은 돼지 그림이었고 화제(畵題)는 '무조건 먹자!'였다. 그리고 그 여백에 고구마 도장에 고추장 바른 낙관으로 예서(隸書)체의 '담대심소'(膽大心小·간담은 크게 갖되 마음은 작게 가지라)를 적어 넣었다. 중국의 일반적인 사자성어(四字成語)겠지만, 내가 알기로는 '항일전쟁과 6·25때 연안파(延安派)의 '무정'(武丁)이라는 장군이 부하들에게 내리는 늘 두고 쓰는 문자였다고 한다.

창 너머에 오리나무 숲이 있었다. 입원할 때는 벌거벗었던 나무들이 봄이 되니 새파란 봄물이 올라, 그 눈부신 연초록 빛을 바라볼 때마다 황홀한 생명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몰래 눈물짓곤 했다. 하늘빛이 푸르러지고 노고지리가 우짖었다. 밤에는 뒷산 숲속에서 소쩍새도 울었다.

아아!
살았다.
나는 이제 살아났다!

한 여자에게서 엽서가 왔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갈 것이다.'
너무 당연한 소리라 아무 느낌도 없었다.

한 다른 여자가 면회를 왔다. 과일과 쇠고기를 가져왔는데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한참 앉았다가 멋적게 돌아갔다. 한 또 다른 여자가 면회를 와서 불광동까지 외출하자고 한다. 맛있는 저녁을 사겠다고 한다. 어쩌다 따라나섰다. 저녁만 아니라 차까지 마시다가 밤이 깊어 조그마한 여관방에까지 갔다. 그녀가 아무리 나를 자극해도 내 마음과 몸은 꼼짝도 안했다. 혼자 술을 마시던 그녀는 잠이 들고 나는 그곁에 오똑 앉아 한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우고 나서 이른 새벽 간단한 쪽지 하나 달랑 남긴 뒤 돌아왔다. 쪽지에 왈,
'잊어줘!'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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