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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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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9>

오윤(吳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캄캄한 겨울밤, 나는 수유리 쌍문동에 있는 미술대학생 오윤의 집, 소설가 오영수(吳永壽) 선생 댁으로 가고 있었다. 버스도 끊어져 없는 수유리 돌개울을 비틀거리며 비틀거리며 서너걸음에 한번씩은 멈춰서서 숨을 갈아쉬며 피가래를 뱉으며 조금씩 조금씩 걸어나가고 있었다.

오윤은 화가 오숙희 선배의 동생이고 오숙희 선배는 1960년 4·19 직후 미술대학의 농성시위때 친해졌다.

오선배의 집에 처음 놀러 간 날, 그 어느 여름날 오후 유리창으로 길고 붉은 석양(夕陽)이 비쳐들 때 그 노을빛 속에 빛을 뿜는 한 자그마한 기름그림을 보았다. 그것은 얼른 보아 똑 적탱(赤幀)이었다.

몇 개의 낮은 구릉(丘陵)이 노을발에 붉고 둥그스럼하게 누워 있었다. 그것은 젖가슴이었고 농염한 우주적인 육욕(肉慾)이었다. 그것은 살아 생동하는 생명(生命)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의 시퍼런 하늘은 잔혹한 금기(禁忌)요, 죽음을 선고하는 신(神)의 무서운 눈초리요, 가차없는 파멸의 숙명(宿命)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자그마한 그림이 미소짓고 있었다. 앙드레 말로의 저 '침묵(沈默)의 소리' 가운데서도 절정으로 평가되는 반항의 아름다움들, 희랍 흉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최초의 미소, 신(神)에 대한 반역의 시작을 알리는 불륜한 '육욕(肉慾)의 상징'이었던 그 엷은 미소, 불그스름한 살의 웃음!

소스라쳐 놀라 나는 오선배에게 이게 누구의 그림이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오선배는 대답 대신 이미 문안 들어서고 있는 동생 오윤을 손으로 가리켰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가.
"윤입니더."

나는 정신 잃은 사람처럼 웃어댔고 미친 사람처럼 떠들어 대었다. 탱화(巾貞畵)를 비롯한 돈황(敦煌) 불교미술과 고려미술(高麗美術) 잘 보라고, 단원(檀園)과 혜원(惠園)을 잘 보라고. 프랑수아 라블레를 가능한 한 영어로라도 읽도록 하고 부류겔을 재평가하라고, 그리고 멕시코의 시케이로스와 디에고 리베라를 깊이 공부하라고. 쉬임없이 주문한 것 같다.

그 뒤로 자주, 내 집처럼 드나들며 오윤과 친해진 그 집, 그 아담한 집, 쌍문동 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 오윤은 미술학교에 입학하였고 내 영역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 오윤의 집으로 눈보라 몰아치는 캄캄한 겨울밤 나는 가고 있었다.

문앞에까지 가서 부저를 눌렀다. 한참만에 윤의 동생 영아가 나왔는데 윤이와 오선배가 함께 경상도 언양에 갔다고, 집엔 없다고. 그리고는 들어오라는 말도 없이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모님이 아직 주무시지 않는 듯했다.

돌아섰다.
순간 심한 비린내와 함께 핏덩이가 꿀꺽 하고 넘어왔다. 눈 위에 흩어진 피는 시커멓게 보였다. 거의 기어가듯 더듬걸음으로 돌아가다 개울바닥의 돌덤부락에 쓰러지듯 앉았다. 내 앞엔 두 개의 길이 있었다. 그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단 하나의 희망도 없는 마지막 굽이였다. 하나는 자살이었고, 다른 하나는 결핵요양원에서의 장기적인 투병이었다.

아직도 취기가 가시지 않았다. 소주를 도대체 몇병이나 나팔불었던지!

결단해야 되었다. 두 길 중 하나를 결단해야만 되었고, 아마 그래서 윤이, 나의 윤이를 마지막으로 보러 온 것이었다. 매서운 눈보라 속에 땅땅 얼어붙은 개울바닥 돌덤부락 위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꺼내 피웠다. 또 기침이 터졌다. 온몸이 다 강그라지도록 쿨룩거렸다. 핏덩이가 또 넘어왔다. 그리고 숨이 차왔다. 그래도 담배를 깊숙이 빨아 마셨다.

'빨리 결정해야 한다!'
'결정하고 이 밤이 새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

하늘도 땅도 집들도 캄캄했다. 내 마음도 캄캄하고 내 몸도 캄캄했다.
나는 왼손 장심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그 침을 탁 때렸다. 처음엔 침이 잘 안 나와 두 번 세 번 그렇게 했다. 침이 오른쪽으로 튀면 요양원으로 들어가 몇년이든 각오하고 투병할 것이며 왼쪽으로 튀면 어느 낯선 시골로 내려가 사람 뜸한 숲에 가서 농약을 마실 셈이었다.

이미 용산철도병원 원장으로 계시는 송철원 형의 아버님께서 요양원 입원을 주선해 주시겠노라 약속했다. 그리고 농약도 이미 치사량을 마련해 호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결정만 내리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때 신라적 만파식적(萬波息笛)의 그 대나무 분합(分合)처럼, 아득한 수천여년 전의 동이족(東夷族), 우리 선조(先祖)들마냥 우족점(牛足占) 대신 '가래침점(占)'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불을 질러 소 발굽이 갈라지면 흉(凶)이고 합쳐지면 길(吉)한 것이듯 침 튀는 방향이 오른쪽이면 살고 왼쪽이면 죽는 것이다.

네번째에야 제대로 침이 튀었다.
오른쪽이었다.

아아!
그 순간 나를 엄습한 치욕감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또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더럽고 더럽게스리 또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눈보라는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내 상반신에 몰아쳤다. 아직 가시지 않은 취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바람 속에서 소리소리질렀다. 눈물, 콧물에 눈까지 뒤범벅이 되어,

"살란다아―!"
"살아야 한단다―!"
"네 에미 씹이다아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수유리 입구였던가, 작은 여관에 들어가 소주를 시켜놓고 해 뜰 때만 기다렸다. 나는 며칠뒤 서대문 역촌동 포수마을 저 안쪽 산 언덕에 있는 역촌동 시립 서대문병원, 그러니까 폐결핵요양원에 푸른 환의(患衣)를 입고 입원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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