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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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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7>

남상(濫觴)

민족문화운동의 남상은 언제부터였을까.

4·19 직후 최창봉(崔彰鳳) 선생이 내게 건넨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론 장래에 연극배우나 연출가가 되겠다는 계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연극에는 참가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공부와 삶의 지루함에서 탈출시켰기 때문일까.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이후 윌리엄 서로우연의 '혈거부족'(穴居部族), J. M. 싱그의 '서쪽세계의 멋장이'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기억에는 없는 코미디 '위대한 곡예사(曲藝師)' 등이었고, 원주에서는 '춘향전'(春香傳)의 연출을 돕기도 했다.

내 자신이 쓰고 연출한 단막극 '두 개의 창(窓)'이 생각난다.
태풍으로 인해 파선한 두 선원(船員)이 한 외로운 섬에 상륙하여 그곳의 외진 주막(酒幕)에서 겪는 어두운 기억과 환영의 고통, 그리고 폭풍 속에서 새롭게 자라나는 현실의식과 우정(友情)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무척 환상적이고 '슈르적'(的)이었다.

그 이후 조동일의 장막극 '허주찬 궐기하다'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른바 '민족문화운동'은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그 시작, 그 남상(濫觴)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1964년 '5·20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행사와 시위대에 상연된 조동일작 '원귀(怨鬼)마당쇠'일 것이다.

세트도 없는 문리대 운동장의 스타디움에서였기 때문에 아직 '마당'과 같은 원형(圓形)을 확보하지는 못했으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당쇠'는 마당극 또는 마당굿 등 소위 '민족문화운동'의 틀림없는 원조(元祖)요, 남상(濫觴)이다.

그 뒤를 이어 내가 각색(脚色)하고 연출한 박연암(朴燕岩)의 '호질'(虎叱)과 조동일이 쓴 ' 야, 이놈 놀부야!'가 나온다. '호질'(虎叱)은 마당이 아닌 나무마루의 강당이었지만 무대는 완벽한 원형(圓形)이었고, 이른바 '협동적 시각'(協同的 視覺)을 구현하는 연출기법이었으며 '놀부'는 서울대 본부의 돌계단 앞 마당에서였으니 초기 '스케네' 즉 간단한 배경이 있는 희랍식 원형(圓形)무대인 셈이었다.

반(反)독재 민주화운동의 전 시기를 언더그라운드에서 휩쓸었던 '민족문화운동'의 전위(前衛)는 문학(文學)과 함께였지만 그보다 오히려 더 첨예하게는 마당극·마당굿 그리고 풍물과 놀이운동이었다. 노래도 미술도 무용도 영화도 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였지만 그 종합성, 대중성, 영향력과 현장성 등에서 연희예술쪽이 가장 진취적이었는데 이미 그 특징이 '원귀(怨鬼) 마당쇠'와 '호질'(虎叱)과 '놀부야'에서 드러난 것이다.

그밖에 부질없는 사족(蛇足)인지 모르겠으나 그 무렵 탁월한 이론가이도 했던 외우(畏友) 서정복(徐正福) 형이 나의 시(詩) '황톳길'을 두고 '최초(最初) 최후(最後) 최고(最高)의 시'라고 평(評)하고 '한편(篇)으로 충족(充足)됐으니 시를 그만 쓰는 게 좋겠다'고 한 극찬(極讚)이 생각난다.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문자(文字)방면에서의 민족문화운동, 그 남상(濫觴)의 성격을 짚어내기 위함인데, 아아! 그 시 '황톳길'에 이미 생명(生命)과 살해(殺害), 즉 '살림'과 '죽임'의 대결(對決)이 나타난 것을 어찌 보아야 할까. 시퍼런 탱자와 물위를 뛰어오르는 숭어들, 그리고 갯가의 거적 속에서 썩어가는 송장, 애비의 송장! 내가 감옥에서 체험한 허공을 울리던 그 '생명'(生命)의 에코, 그리고 출옥후(出獄後) 동학과 함께 강조한 생명의 세계관(世界觀)이 너무 한가하다는 정도의 평(評)을 넘어 배신(背信), 변절(變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사이비(似而非)로까지 폄하된 일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동지(冬至)에 이미 여름이 시작된다는 주역(周易)의 복괘(復卦)의 깊은 뜻, 그리고 복괘가 다 떨어지고 남은 단 하나의 과실을 말하는 박괘(剝卦)의 바로 다음에 오는 역리(易理)의 숨은 뜻은 이것과 무슨 관계일까. '역'(易)이 다름아닌 '생명학(生命學)'임을 강조하는 동양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또 무엇을 뜻하나?

'호질'(虎叱)의 둥근 무대에 이미 모난 방형(方形)이 아닌 '시각(視覺)의 시너지' '협동적(協同的) 시각(視覺)'에 응(應?)한 '생명적(生命的) 연희(演戱)'의 씨알이 잉태됐다는 얘기에는 또 어찌 대응할 것인가.

훗날, 문화운동(文化運動)의 차세대(次世代)인 김민기(金敏基) 그룹들의 빛나는 창조력의 한 샘물로 평가되는 그 남상(濫觴)에 나와 조동일 형의 우정(友情)과 협조가 있었던 것을 예술사, 문학사적인 면(面)에서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너무 자화자찬(自畵自讚)이 지나친 것인가.

답십리에 숨어서 나는 결단했다. 내가 설 곳은 퀘퀘한 냄새가 나는 대학의 미학이 아니라 싱싱한 피가 도는 생명과 한(恨)스러운 죽임, 그 살해(殺害)가 일반화되어가는 상상 속에서의 살아있는 미학, 곧 민족문화운동임을 결단한 것이다.

서운하고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시원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그때 이미 나는 몸과 마음이 퍽이나 지쳐 있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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