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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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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6>

답십리

원주의 청강 선생과 연락이 되었다. 악어 형을 통해서였다. 형의 친척동생인 정현기 형의 답십리 장한평 집에 가 피신할 수 있게 되었다. 정형은 지금 문학평론가로서 연세대 교수다.

지금은 어찌 변했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곳이 아주 시골과 흡사했다. 너른 벌판에 뚝이 있고 수로(水路)가 있어 또한 수문(水門)이 있는데, 정형 집은 바로 수문(水門) 근처에 있었다. 정형의 작은 방에는 출입문 외에 자그마한 창문이 하나 있어 세상으로 열린 나의 시야(視野)가 대저 이 작은 창문만밖에 안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작은 방에서 창으로 들쳐드는 흰 볕살로부터 고향을 떠나 돈 벌기 위해 서울길 가는 한 이름 없는 처녀의 얼굴빛을 보았다. 놋쇠 빛깔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 방에서였을까. 그 방에서 시(詩) '서울길'이 쓰여졌으니 그 까닭은 뭘까.

대답은 이렇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남이 이름지은 사물이나 사태의 특징들이 아니다. 어느 사물이거나 공간이거나 간에 내가 내 공간으로 변형시키는 데서 새로운 특징이 생겨나고 나는 그것에 의지해서 객지(客地)와 타향(他鄕)을 견뎌내는 것이다. 그러매 때로 내가 건방지며 주제넘어 보이고 아쉬운 말을 하면서도 우쭐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은 이미 갔다. 나이든 나를 수줍음과 쓸데없는 정도의 염치를 살피는 소극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예절을 차릴 수 있는 변화에 나는 안도한다. 하마터면 '불가촉 천민(不可觸賤民)'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었으니까.

서울을 향해 출발하는 사람의 마음엔, 그러므로, 반드시 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골의 형편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 그것을 찾고자 하는 가치지향이 내재(內在)해 있다고 할 것이다. 아무데서나 함부로, 되는 대로 살 수 없는 게 인간이며, 그렇게 살기 시작할 때 어떤 의미에서의 이른바 '불가촉 천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떠나고, 그래서 고개를 넘는 것. 그래서 가고 또 가는 것이다.

'간다
울지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피어 돌아오리란
댕기 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냄새가 잊힐까
사뭇 사뭇 못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간다.'

몇개월인지 장한평에 죽치고 있는 동안 청강 선생이 한번 오셨다. 악어 형과 함께. 그리고 그날 말이 헤프고 정신이 너무 방만스러운 이동규(李東奎)형에 대한 숙정(肅正)이 있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잔혹함이었다.
아, 선생은 철저한 정치가로구나!
무섭다.

정형의 방에서 200m 정도만 가면 나와 동갑내기 김철수의 집, 그 오리농장에 이른다. 아버지, 동생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낯이 익고 가까이 사귄 뒤에 들어보니 그의 어머니는 이름난 공산주의자로 6·25 이전에 이미 월북해 버렸다고 한다.

정형과 나와 철수, 그리고 철수 동생 영수 그렇게 넷이서 늘 어울리며 한 시절을 보냈다. 국문학 전공의 정형과 문학 얘기도 많이 나눴으나 무엇인지 외국문학이나 우리의 고전문학의 이미 확립된 체계와 유행의 세계가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음을 느꼈다.

겨울이 가고 이듬해 봄이 되어 벌판에 점점점 풀이 돋고 물빛은 날로 정다워지는데 답십리시장 근처에서 어머니를 한번 만나 안심시켜드린 일 외에는 한번 손혜영 씨와 함께 서대문 감옥 뒤켠 담 너머에 있는 한 지인(知人)의 집 마당에서 바로 마주 보이는 감방 창문을 통해 거기 감금된 박재일 형과 통방을 시도하기도 했다.

박형은 나더러 나타나지 말라고, 붙들리면 크게 고생한다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는 오른팔을 들어 허공에다 오른편으로부터 역순(逆順)으로 큼직큼직하게 글자를 썼다.

'건강!'
'신념!'
'낙관!'
그렇게 쓴 것 같다. 이상한 것은 그때 허공이 그냥 허공이 아니라 무수한 점들로 이루어진 암호문자(暗號文字)의 체계로써 내가 글자를 쓸 때마다 무수한 점들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어떤 부호를 만들어 그 글자 이면(裏面)의 마음을 전달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 지루한 세월 정형의 서가(書架)에 꽂힌 문학책들을 많이 읽었고, 자주 찾아 주는 악어 형과 정치나 운동 등에 관해 숱한 견해를 서로 나누었다. '서울신문'에 나가던 악어 형이 은평의 갈현동에 새집을 마련하고 나를 초대했던 날 밤이다.

그 자리에는 악어 형의 처남들인 작곡가 강준일(姜駿一), 문화기획가인 강준혁(姜駿赫) 그리고 형수 강연심(姜蓮心), 선배의 여동생들, 그 남편들, 그리고 철수와 악어형 친구인 권오춘(權五椿) 선배 등이 모여 새벽까지 먹고 마셨다.

새벽 일이다.
늦게 잠들었는데도 왠지 일찍 깨어 일어나 이부자리 위에 오똑 앉아 있었다. 나 일어난 걸 어떻게 알았는지 악어 형이 조간신문을 들고 들어와 아무 말도 없이 신문지 한 면을 손가락으로 지적했다. 읽어보라는 뜻이겠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사살(射殺)' 기사였다. 콜롬비아 산중(山中)에서 체포 사살되고 그의 게릴라 조직은 와해되어 전 남미대륙의 공산화(共産化)운동은 물거품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눈을 들어 악어 형의 눈을 바라보았다. 형은 말없이 나를 보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마음이 그때 악어형 마음을 어떻게 읽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 읽고 있었다. 그것은 교조적 공산주의 (敎條的 共産主義), 무장혁명(武裝革命), 게릴라전(戰) 등은 이제 희망없다는 것, 그런 쪽에 기울어져 있다면 꿈을 깨라는 뜻인 듯했다.

복잡한 잡다 속에서 벡타를 결단(決斷)해 나가는 한 구도자(求道者)로서의 오해받기 쉬운, 결코 쉽게는 이해받기 힘든 나의 사상적 경향은 이미 형에게도, 청강 선생에게도 오해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형은 그것이 젊은 나로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미리 셈하고 나서 다음 단계로 표시하는 자기 뜻인 듯했다.

나는 대답했다.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였다.
당신 말이 옳다고, 나도 동의한다고!

그것으로 얘기는 끝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하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뜻이겠다.

우리의 길!
우리만의 길!
그것은 참으로 고난의 길이었다.

한편에 소모적인 극좌가, 반대편에는 거대한 우파적인 안일의 유혹이 입을 벌리고 있으니!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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