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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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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4>

여장부들

학생운동 전면에 이화여대가 돌출하기 시작했다. 미국인지 독일인지 한 신문에 최루탄 연기 속에서 시위하는 여대생 집단의 커다란 사진을 싣고 '좌익학생들'이라는 제목을 달게 한 것은 바로 이화여대 학생들이었다. 그만큼 활발했다.

그 리더의 한 사람인 법과대학의 신춘자(辛春子·그 뒤 辛仁羚으로 이름을 바꿨다) 씨를 만난 것은 명동에서였다. 중태 형이던가, 김도현 형이던가 누군가가 나를 소개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난다. 그러나 나는 듣고 그녀가 주로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다만 내가 바로 그 전날 새로 사 입은 싸구려 위 아래 '쑥덕베' 양복이 신경에 거슬려 자꾸 손이 가던 일 말고는 잘 생각 안난다. 그 뒤 신춘자 씨는 자기 나름으로 공부도 일도 다 잘 해서 지금은 이화여대의 훌륭한 선생님으로 재직해 있다.

오직 그 얼굴이, 그 때는 그렇게 외로워 보이던 그 얼굴이, 사실은 외로움 따위와는 아무 인연도 없는, 아주 매서운 사람이라는 걸 그 뒤에야 들어서 알게 되었다. 사실은 똑바로 아는 데에는, 그러니까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데에는 시인(詩人)이란, 외롭다느니 스산하다느니 하는 따위 시적(詩的)인 인식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된 것뿐이다.

또 한 사람의 이화여대생은 당시 총학생회장이던 진민자(陳敏子)씨다.

그때 내가 늘 틀어박히는 둥지였던 문리대 시멘트담 곁의 포장마차 '길'에 여러 학생들과 함께 어느 날 밤 진(陳)씨가 왔다. 꽉 들어차서 몸놀림이 불편한 속에 진씨와 내가 몇마디 불유쾌한 대화를 주고받았고 그리고 나서 불이 나갔다. 아마 모두들 나와서 흩어졌을 것이다. 그 뒤에 남은 것은 또한 그 불유쾌한 몇마디 대화의 기억뿐이다.

그런데 최근 몇년간 나는 진씨를 간혹 만나 민족문화, 특히 여성의 민족문화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 진씨는 졸업후 입산(入山)하여 오랜 참선생활(參禪生活)로 삶의 코스를 바꾸고 또 그런 방향(方向)에서 여성문화운동을 하고 있다. 이런 것을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고 하는 걸까.

진씨는 학생시절 그야말로 여장부였다. 나는 진씨가 이 비색한 시국(時局)에 진정한 여장부로서 여성만이 아닌 전체를 위한 마고복본(麻姑復本·1만 4천년 전의 女性民族시대의 문화를 회복하는 것)의 민족문화운동에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다.

여장부, 여장부 하지만 김중태형의 애인이었던 고(故) 손혜영(孫惠英) 씨만한 여장부는 드물다. 그녀는 김형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학생운동 리더들 거의 전원을 자기 치마폭에 넣고 주무르고 다스리는 진짜 여장부였다. 늘 술과 밥을 사주었고 갈 곳이 없을 때는 후암동(厚岩洞)에 있는 커다란 자기집 2층 방을 내어주곤 했다.

고인(故人)을 생각하면 하나의 사건이 꼭 기억에 뒤따른다. 그 2층 방에서 한겨을 혼자 자다 깨어 가까운 서가(書架)에 꽂혀있는 '조르주 루오'의 화집(畵集)을 보았다. 인쇄가 너무 좋고 영어로 된 해설이 너무 아름다워 그만 그 책을 옷 속에 얼른 감춰넣고 새벽에 슬며시 나와 버렸다.

도둑!
도둑질이었다.
용서될 수 있을까.
고인(故人)에게 용서를 빈다.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라지만 그것은 신의(信義)의 도둑질이었다. 후회한다.

그러나 도둑질한 재물은 또 누군가가 도둑질해 간다더니, 곁에 두고 보고 또 보고 그리도 아끼던 화집(畵集)을 얼마 안가 도둑맞고 말았다. 마땅한 벌을 받은 것이다. 손씨의 명복을 빈다.

'유끼'!
한자로 외자 이름 '설'(雪)이었다. '최설'(崔雪)은 '설'보다 '유끼'로 더 알려져 있었다.

무교동 뒷골목의 한 스낵바 주인.
그러나 '유끼'는 한국의 민주주의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뒤켠에서 이를 열심히 도운 참으로 몇 안되는 숨은 일꾼들 중 하나였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나와 나를 통해서 동료들, 특히 후배들에게 돌아간 그 숱한 밤낮의 술과 밥, 그리고 교통비·담배값 등이 '유끼'의 노동의 대가였고 그 조그마한 바에서 나온 수입의 일부였다.

일본계였을까.
이름이 왜 그랬을까.
왜 한마디도 자기 신상(身上)에 관한 말을 하지 않았을까.
일본 사무라이 같이 짙고 쭉 치켜올라간 두 눈썹, 찢어진 두 눈. 그러나 조그마한 붉은 입술과 흰 피부는 똑 일본의 '우끼요에'(浮世繪)에 나오는 '게이샤'(妓生) 같았다.

내가 왼종일 왔다갔다, 사람들 속에서 지쳐 노을녘에 타는 듯 목이 마를 때 들어가 털썩 목로에 앉으면 항상 '유끼'는 미소지으며 "웰컴 홈!" 한다.

그 한마디를 듣고 나면 웬일인지 피로가 싹 가시고 산골짜기의 맑은 샘물처럼 신선한 새 생각과 새정서, 새 기운들이 졸졸졸 흐르고 흘러 몸에 가득 차기 시작한다.

그녀는 꼭 미소짓는 보석 같았다.
마치 나의 그 '애린'처럼!

아니, 그녀가 곧 '애린'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남은 소식은 아무 것도 없었다.
상상을 차단해 버리고 떠났다.
어디로 갔을까.

애린!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반드시 살아서 다시 돌아올 것으로 나는 믿는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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