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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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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3>

전선(戰線)

한일조약비준반대운동(韓日條約批准反對運動)은 거대한 전선(戰線)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학생(學生) 측의 김중태(金重泰) 형과 정당 쪽의 윤보선(尹潽善) 대통령간의 연대가 그 중심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두 개의 힘이 가세(加勢)했다. 하나는 장준하(張俊河)·백기완(白基玩)씨 그룹이요, 다른 하나는 고려대(高麗大)의 박상원, 이화여대(梨花女大)의 진민자 그룹이었다.

전국 각 대학에 학단방위군(學團防衛軍)을 조직하여 장기적으로 학교를 근거지와 해방구로 해서 다방면으로 저항해 나가며 나아가서는 조약(條約)을 비준(批准)하는 비준국회(批准國會)를 마비시킨다는 계획도 섰다. 2백여명의 특공대 조직도 구상되고 또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비준국회(批准國會) 때에는 '폭음(爆音)만 크게 나고 살상력(殺傷力)은 없는 사제폭탄(私製爆彈)'을 다수 만들어 단상에서 이를 폭파시키고 '비준(批准) 모라토리엄'을 선포하게 만드는 계획이었다.

나를 폭탄(爆彈)과 특공대(特攻隊) 책임자로 결정하였다. 왜였을까. 아마도 지난해 단식 연좌농성 때 너무나 끔찍하고 너무나 독살스런 시위(示威)를 해서였던 것 같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어느 날 새벽 손정박 형의 집에서 자고 있을 때 김도현 형이 검은 가죽가방을 하나 들고 바삐 들어왔다. 소리만 크게 나고 다치지는 않는 폭탄을 제조하는 데 쓰일 거액의 돈다발들이었다.

내가 회의감을 표시했다. 그런 폭탄이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거였다. 그러나 김도현 형은 막무가내였다. 김형의 눈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우리가 바로 제2의 독립운동을 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손정박 형도 자꾸만 권해 안 맡을 재간이 없었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다부지고 어른스러운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거였다. 김형, 손형, 화약 취급자 그리고 나, 이 네 사람만으로 비밀을 좁히기로 결정하고 나는 검은 돈가방을 들고 그 자리를 떠났다.

원주로 갔다. 간 곳은 원주의 집이 아니라, 집에는 그때 안들리고 바로 서울로 돌아왔지만, 내 친구 '나코빨갱이'가 경영하는 커다란 고물상이었다. '나코빨갱이'는 본명이 '나형수'로, 서울대 농대를 나왔고 고물상을 경영하며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화약 등을 광산쪽으로 소비시켰기 때문에 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형도 회의적이었다.

"그런 폭탄이 어디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해봐. 돈은 넉넉히 있어. 구애받지 말고…."

"어려워… 어려워… 어려워…."

그러나 사용 목적을 자세히 들은 나형은 일단 해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실험을 나형에게 맡기고 나는 청강 선생께 들러 비밀리에 거기서 며칠 쉬고 다시 나형을 만났다. 나형은 사흘 동안 쉬임 없이 다종다양한 방법으로 부론강변(富論江邊)에 나가 고기잡는 체하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지만 결과는 불가능이었다.

"김형! 똑바로 들어둬! 자재 부족이 절대 아니야. 자재는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써봤어! 불가능이야! 소리가 클수록 살상효과는 높아! 안 그러면 폭죽밖에 안돼! 몰로토프칵테일 정도의 화염병밖에는 안돼! 어느 정도의 찰과상이나 타박상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데 그 정도로는 큰 폭음도 기대할 수 없어! 내 충고 하나 할게! 이 계획은 좀 유치해!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돈은 조금 쓴 것 외에는 그대로였다.
돌아가기로 했다.
서울길은 씁쓸했다.
손정박 형의 집에서 다시 김도현 형을 만나 돈가방을 되돌려주고 포기를 권유했다. 거기서 다시 '몰로토프칵테일' 이야기가 나왔다. 원주에서 검토됐는데 거기서는 칵테일이 시가전용이지 실내폭음용이 안된다고 했었다. 나는 다시 포기를 권유했다.

김도현 형은 의기가 매우 저상해 있었다. 꼬치꼬치 물으니 대답은 이러했다.

"황아무개라는 주먹 대학생이 특공대 지휘자인데, 이 자가 한 여학생 때문에 배신해서 당국에 이 계획을 찔러 버렸다."

이렇게 해서 폭탄과 특공대 일은 모두 중단된 셈이다. 거리는 거의 매일 학생 시위대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날마나 최루탄 연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정부는 학생 시위를 노골적으로 좌파로 몰기 시작했으며 외신(外信)까지도 시위(示威)를 '한국의 좌파 학생들'(The LEFTIST Students of South Korea)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하긴 유럽과 미국과 일본에서까지도 신좌익(新左翼)들의 동조나 지지 발언이 나왔다. 교포들 속에서도, 북한에서도, 일본의 양심세력 속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이 사건은 두가지 문제로 압축된다. 하나는 36년간의 착취와 억압, 무자비한 식민통치의 결과(結果)를 보상금 몇 푼으로 씻어낼 수는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에 따르는 차관 공여 등으로 일본에의 경제 예속과 매판화가 추진된다는 위험이었다.

박정희의 과거 친일 경력이 크게 불거져 나왔고 이를 주공(主攻)한 것은 특히 일제 침략시 중국에서 몸소 항일무장투쟁을 경험한 장준하 선생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저 유명한 백기완 선생이 있었다. 나는 백선생과 말도 많이 하고 술도 많이 했는데 처음 만나던 그 날이 생각난다.

김중태 형이 아주 큰 '물건'(그는 그때 일본말로 '모노'란 용어를 썼다) 하나를 소개시켜 준다고 나를 데려간 명동의 한 다방에서였다.

날카로움,
그리고 힘,
저돌성,
그리고 꾀.

그랬다.
그런 것이 뭉쳐진 검은 가죽잠바의 한 커다란 주먹왕초님이 한 분 거기 앉아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내 나를 웃음기 없는 얼굴로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조용히 일어나서 나갔다.

그런데 어디서 꼭 본 얼굴이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한참을 기억하려 애써도 떠오르지 않더니 저녁 대학가의 술집 '쌍과부집'에서 막걸리를 한 잔 먹다가 홀연 생각났다. 자유당 시절 고등학교 3학년때 나는 고등학교 학생들의 산림녹화대로 소집된 적이 있다. 서울 시내 산림녹화대가 함께 모인 명동의 시공관에서 어느 날 연설회가 있었다.

그때 한 깡마른 젊은이가 한 사람 무대에 올라왔다. 나 말고는 다들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인가 보았다. 박수와 웃음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빙그레 웃더니
"웃지 말라우."

이북 사투리였다. 웃음소리와 박수는 더 거세졌다. 그리고는 내리 '썰'을 푸는데 보통이 아니었다. 당시 인기리에 상영되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스토리를 바로 우리들 한국 젊은이의 실존적 상황으로 바꾸어 실감나게 표현하고 웅변으로 우리를 격동시켰다.

'다다다다다다다―'
게리 쿠퍼가 손가락으로 방아쇠 당기는 마지막 장면의 시늉을 하면서 마이크에 기관총 연발음을 내보이는 얼굴이 샛노오란, 깡마른 젊은이, 그가 바로 한국학생녹화대장 백기완 선생이었다.

기관총 연발음을 끝내자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쥐어 흔들어 보이며 크게 외쳤다.
"이렇게 살라 이 말이야! 죽지 말라우! 살아! 살란 말이야! 죽더라도 이렇게 쏴대며 죽으란 말이야! 그게 산거야! 알갔어?"

철저한 민족주의자 백기완 선생과 나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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