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2>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2>

청강(靑江)

1965년 초여름 언젠가 원주(原州)에서 감옥에서 출옥한 지 불과 몇달이 안되는 장일순(張壹淳)선생을 만나 술과 밥을 먹은 일을 잊을 수 없다. 그때는 이미 한일조약(韓日條約)의 국회비준(國會批准)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시작된 뒤이다. 분명 시간적으로 뒤인데도 의미적으로는 그 앞에 위치한다. 기억이란 가치론적인 것인가.

생의 막역지기인 한 중국인(中國人)의 가게에서인데, 거기 선생 외에 내가 악어(鰐魚)라고 별명해 부르는 한기호(韓基昊) 선배와 이미 고인(故人)이 된 이인창(李仁昌)형이 자리를 같이했다. 선생의 자호(自號)가 청강(靑江)이다. 청강은 그 뒤 무위당(无爲堂)으로 바뀌고 다시 일속자(一粟子)로 바뀐다. 청강이란 아호(雅號)는 선생의 스승인 차강(此江) 선생께서 지어주셨다 한다.

'청강'하고 입속으로 부를 때마다 수운(水雲)의 시구(詩句)인 '청강지(靑江之) 호호혜(浩浩兮) 소자(蘇子·소동파) 여객(與客) 풍류(風流)'의 열두 글자가 선명히 떠오른다.

이것은 분명 서정시이지만 동학과 옛 선도의 모든 것이 그렇듯 동시에 조직활동의 암호(暗號)다. 길게 늘어놓을 틈은 없지만 잘라 말해서 이것은 최고운(崔孤雲)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있는 풍류의 설명 중 '포함삼교'(包含三敎)에 대응(對應)한다.

동학도(東學徒) 이외에 유·불·도(儒·佛·道) 삼교(三敎)의 명망가(名望家)들 중 동조자(同調者)들과 함께 어울려 풍류, 즉 선도의 생명회생(生命回生)의 길을 가라는 것이니 어찌 보면 통일전쟁(統一戰爭)이요, 다시 보면 그물, 즉 네트워크다.

왜냐하면 '함'(含)은 '품다'이지만 '포'(包)는 보따리나 소쿠리처럼 숭숭 구멍뚫리거나 삐죽삐죽 물건 모습이 드러나도 훤히 속비치는 '얽힘'속에 서로 다른 이것 저것을 함께 담는다는 뜻이니 이는 곧 포접제(抱接制)의 '포'(包)라는 것이며 혹은 '네트워크'란 말이다.

청강(靑江)이란 그럼 뭘까?
더욱이 그것이 넓고 넓다면?

그 앞의 시구인 '청풍지(淸風之) 서서혜(徐徐兮) 오류(五柳·도연명) 선생각비(先生覺非)'가 주체(主體)인 동학도(東學徒)의 풍류(風流)의 때, 개벽의 시운(時運)이 자꾸 늦어져가는 그 주체적인 까닭은 자신들의 수양(修養)과 조직 미비(組織未備)로 깨닫고 크게 반성하며 각오하는 뜻이라면 그 자체로는 '접'(接)이니 동학(東學)의 주인 기운이요 줄기찬 추진력이겠다.

또한 그것은 천시(天時)가 가져다주는 세력(勢力)이자 형세(形勢)이다. 그런데 모든 병법(兵法)은 바로 이 세(勢) 즉 '호호(浩浩)한 청강(靑江)'의 진척 앞에서는 그 어떤 장애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매 강풍류(江風流)의 주인공(主人公)인 소동파(蘇東坡)는 나그네(三敎의 知識人들, 名望家들)와 어울려 풍류 생명(生命)의 변혁(變革)·선도혁명(仙道革命)을 놀게 된다는 뜻이다.

아아, 청강이 그런 뜻인가.
그때 벌써 그런 청강의 뜻을 다 알았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 있나!
안 것은 지금이다.
그러나 그때 이미 느낌은 있었다.

나는 청강 선생과 손을 잡고, 얼푸시 그 분을 모시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아마 그 날 술에 대취(大醉)했던가 보다. 선생에게, 내가 너무 좋은 나머지 건방을 떤 모양이다. 악어 형이 나를 밖으로 끌어내서 한대 쳤다. 그러자 나는 껄껄 웃었다고 한다. 이동규 형이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또 다시 껄껄 웃었다고 한다. 청강 선생께서 모두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가니 온화한 얼굴로 왈,

"먼 길 갈 텐데 술자리조차 편치 않다면 어떻게 뜻을 모으나? 서로 사과를 하게!"
내가 대뜸 가로되 "형님 죄송합니다, 이형 미안하오."
악어 형은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형님과 나 사이엔 그 뒤로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얼굴 붉히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얼굴 붉히기는커녕 친형과 친아우 사이였다. 길고 긴 세월을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사랑했다.

청강 선생은 20대 청년 때부터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선생의 제자요, 추종자였고 6·25 이후에는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선생의 동조자였으며 4.19 전후에는 윤길중(尹吉重)씨와 같은 혁신계(革新系) 동지였다.

선생의 사상은 단적으로 말해 좌우의 통합이었고 영성(靈性)과 신학(神學)의 통전이었으며 동서양과 남북의 통일이었다. 4·19 직후의 총선에서는 사회대중당 후보로 원주에서 출마도 했으나 5·16후 3년간 옥고(獄苦)를 치르고 나오신 뒤부터는 생각이 달라지셨다고 한다.

그날 술이 좀 깬 뒤에 이런 말씀을 했다.

"지금 베트남에서는 불교와 호치민(胡志明) 세력이 연대하고 있네. 남미에서도 가톨릭이 혁명세력과 함께 전선에 선 데도 있어. 카밀로 토레스 신부(神父)가 그 예야. 이것은 아마 새 시대의 새로운 조류(潮流)라고 생각해.

지금 가톨릭에서는 1962년부터 지난해 1964년까지 3년간 제 2차 바티칸공의회(公議會)를 열고 인간의 개인 구원과 사회적 구원을 함께 추진하는 문제를 검토했다고 하네. 아직 그 결과는 알 수 없으나 몇 년 안에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아. 벌써 여러해 전에 교황(敎皇)들의 사회와 정치와 노동문제들에 대한 칙서가 발표된 일이 이미 있으니까.

감옥에서 많이 생각하고 또 나와서 생각한 것인데 이제는 정치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안돼. 정당 같은 것으로는 소용 없어. 종교를 우회해야 하네. 종교를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대중운동에 사활이 걸렸네. 이미 동양에서는 인도의 간디와 비노바 바베의 예(例)가 있지. 힌두교와 인도철학을 배경으로 영국식민주의에 저항하며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천민(賤民)계급을 해방하는 여러 운동을 전개한 예가 있으니까.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불교도 중요시하지만 우선 가톨릭, 그것도 새로운 혁신적 가톨리시즘에 기대를 건다네. 전 교황 요한 23세께서 영면하시기 직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나!

"답답하다
창문을 활짝 열어라!"

지금 가톨릭은 어둡고 답답해. 그러나 이제 창문을 열기 시작하면 개인 구원과 사회 변혁의 새로운 에너지원(源)이 될 거야. 그 힘을 타고 개혁과 민주화와 통일의 길을 찾아 보세. 그 과정에 우리 나름의 새로운 사상과 노선과 세력과 근거가 나타나지 않겠나!"

한기호 형과 이동규 형이 다 함께 가톨릭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나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판단 이전에 많이, 깊이, 넓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리라 다짐했다. 혹 이것이 내가 찾는 '내면의 평화와 외면 사회의 변혁의 통합' 곧 '요기 싸르'의 길은 아닐까.

술은 이미 다 깨어 버렸다. 청강 선생이 다시 술을 권했다. 청주를 큰 자장면 그릇에 따라 주셨다. 다 마셨다. 또 따랐다. 다 마셨다.

따르고 마시고 따르고 마시고.

캄캄한 내 마음 허공에 반짝 푸른 별 뜨듯 영롱한 몇가지 생각들이 사뭇 샛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이 내 생애(生涯)에서 중요한, 매우 중요한 날이 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들어 사는 좁은 방구석으로 들어가 누웠다. 무언가 새로운 느낌이었다. 나는 이날 이후 이른바 '원주캠프'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요기 싸르'에의 꿈! 그 가능성에 미소를 띤 채 나는 달콤한 잠에 빠져 들어갔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