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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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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0>

청맥(靑脈)

'청맥'(靑脈)이라는 민족주의 잡지가 그때 있었다.
문리대 선배인 김질락·이문규씨가 발행하고 송복·구동태·심재주 씨 등이 편집하는 새로 생긴 진보적 민족주의 잡지였다. 나중에는 그것이 평양에 의해 만들어진 남한 내의 '통일혁명당' 조직의 전위 기관지라는 사실이 그 당조직의 검거, 와해와 함께 밝혀져 꿈쩍 놀란 적이 있지만 그 무렵으로서는 논조가 좋았고 편집도 뛰어났다.

조동일 형은 청맥의 좋은 고정필자였는데 한번은 조형을 통해 청맥에서 내게 동학(東學)의 갑오혁명(甲午革命)을 주제(主題)로 한 한편의 장편 민족서사시를 써달라고 부탁해 왔다. 나는 그때 아무 계산도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 집안이 동학 집안이라는 것과 어렸을 때 전설처럼 들은 해남(海南)에서의 대전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암 쪽에서 해남반도로 들어가려면 고개를 하나 넘는다. 그 고개가 우슬치(牛膝峙)인데, 우금치는 이미 다 알려진 장소이므로 우슬치라는 외진 시골에서 마지막 동학을 다루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순식간에 내려진 것이다.

우슬치에서 관군과 일본의 연합군에 맞서던 2,000여명의 동학군이 전멸했는데, 지금도 고갯마루에 달이 뜨면 하얀 갈꽃들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노래 노래 부른다는 외할아버지의 옛 이야기를 아주 어렸을 때 들은 적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 통감부와 총독부 시절 해남에서 순검과 국민학교 선생님을 지내신 분이어서 해남이야기는 모두 다 환했다.

나는 그 전설을 판소리 형식의 서사구조 안에 담고자 했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라는 미학적 요구에서였다. 한 200여행을 써나갔을까. 당시 출간돼 나와 있던 유일한 동학 관련 서적인 최동희(崔東熙) 선생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열심히 읽고 그 뜻을 새기며 판소리의 현대화를 시도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백방으로 몸부림쳐 봐도 아직은 역부족(力不足)이었다. 조형도 창작에 임해서는 그리 큰 도움을 못주었다. 나는 할 수 없이 훗날의 작업으로 미루고 200행의 서정시 20묶음 분량의 이름뿐인 그 서사시를 불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동학(東學)의 사상적 특질을 철학적으로 이해함에서나 판소리의 현대 서사구조화의 미학적 기능에서나 나는 아직 걸음마에 불과했다. 청맥쪽에 포기를 전달했지만, 그 부채감이 내 평생(平生)의 그것으로 남게 되었음을 꿰뚫어본 사람은 조형뿐이다.

어찌 보면 '오적'(五賊)마저 바로 그때 시도했던 판소리 서사시를 위한 '에튀드'(試作으로서의 소품)에 불과하며 그 뒤에 나온 산문집 '밥'이나 '남녘땅 뱃노래' 등도 그때 실패한 동학사상 이해의 한 부분적 시도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숙제를 졸업 후 폐결핵 요양원에까지 갖고 들어갔다. 그것을 잘 아는 조형이 졸업 무렵 내게 알려준 말이 있다.

"지금 어디선가 창작기금을 받아 신동엽(申東曄)시인이 동학서사시를 쓰고 있어. 그 결과가 한 2년(年)뒤에는 나올 것 같으니 그 결과를 보고 나서 김형이 시도해도 늦지 않을 것 같군. 조금 기다려!"

나는 기다렸다.
요양원에 가서도 기다렸다.
그래.
끈질기게 기다렸다.

2년(年) 뒤던가? 조형이 '금강'(錦江)이라는 제목의 신동엽 서사시를 들고 서대문 역촌동(驛村洞) 언덕 위에 있는 시립 폐결핵요양원에 올라왔다.

"한번 보면 알겠지만 '대하'(大河)가 아니라 또랑물 스무개 묶어 놓은 거야. 김형이 다시 써야겠어!"

다시 써야 한다?
다시 써야 한다?

그때 조형은 두가지 매듭을 짓고 갔다.
그중 하나는 자신은 문학평론(文學評論)을 하지않고 대학에서 학문(學問)을 공부하겠다. 그렇게 해서 사회에 이바지하겠는 것. 또 다른 하나는 평론(評論)은 염무웅(廉武雄) 형에게 맡기고 나는 창작(創作)에만 전념(專念)해줬으면 좋겠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대구(大邱)로 내려간다는 거였다.

병원생활 이후 한번 그의 계명대(啓明大) 시절에 대구(大邱)에 가 만난 적이 있으나 그 뒤 우리는 몇년만에 한 차례, 혹은 10년만에 겨우 한 두번 만날 정도로 멀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우정(友情)과 우리의 토론 내용들과 합의(合義)는 사라진 것도 멀어진 것도 아니다. 멀리서도 작품이나 논문으로 서로를 확인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해남으로 낙향(落鄕)하기 직전 작가 황석영씨 등과 미리 해남에 들러 그곳 친구들의 대접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가 좌정한 곳은 '구림'이라는 곳인데 대흥사(大興寺)와 진도(珍島) 그리고 해남 읍내(邑內)로의 세 갈래 길이 갈라지는 병풍산 (屛風山)자락에 수십채의 요릿집을 세워놓은 '거품식(式)' 관광단지였다.

한 방안에서 술을 마시는데 이상하게 심기(心氣)가 불편했다. 뿐만 아니라 벽지(壁紙)의 문양이나 창문의 깎음새 등이 흐릿한 불빛 아래 괴괴(怪怪)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바라본 황석영씨의 얼굴이 아주 기분나빠하는 표정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
"왜그래? 기분 안좋아?"
"형은 안그러우? 이상하지 않아? 이 집 좀 이상해!"

"그렇지? 우리 나갈까?"
"나갑시다. 당장!"

우리는 일어서 나왔다.
나오면서 해남 토박이 친구더러
"이 집 터, 여기 어떤 데야?"

해남병원의 김동섭(金東燮) 형과 해남 YMCA의 김성종(金聖鍾) 형이 거의 동시에 외치듯 대답했다.
"아, 동학당 2,000명이 몰살한 데 아니오!"

"아하! 그럼 여기가? 그럼 우슬치가 아니라 바로 여기 '구림'이…?"

동섭이 말을 이었다.
"여기 요릿집들 들어서기 이전에 텐트를 치든가 하면 꿈에 시커먼 농꾼들이 나타나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애원을 한다는구만요. 그라고는 코펠에 남은 밥이나 과자나 사과 같은 음식은 다 없어져 버린다는구만요!"

"아하! 여기로구나!"

요릿집을 나서는 우리 눈에 벌판 너머 밤하늘, 남쪽 하늘 시커먼 하늘에 무슨 빛줄기 같은 것이 휙 지나가는 듯했다.

혜성인가? 귀신인가?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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