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이다. 그러니까 1964년과 65년 사이의 그 겨울.
지금 생각나는 것은 외우(畏友) 박재일(朴才一) 형이 고향 경북(慶北) 영덕(盈德)에서 장가가던 일뿐이다. 구식 결혼이어서 나와 김중태·최혜성·김도현 형 등이 신랑 후배(後輩)를 서려 영덕으로 내려갔다.
영덕대게가 많이 잡히던 어항(漁港) 강구(江口)직전의 바닷가인 장사(長沙)에서 내륙의 산간(山間)지역으로 30리를 더 들어간 산골 중의 산골로, 우리가 걷기 시작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땅거미 질 무렵이었다. 거친 시골길에 익숙하지 못한 걸음으로 한밤중이 되고 시퍼런 하늘에 주먹만한 별떨기들이 번쩍번쩍 빛나는 한 저수지 근처에 가자 시커먼 산기슭에서 횃불 열댓개가 춤추듯 흔들리며 우리쪽으로 내려왔다.
박형의 사촌동생인 박재두 씨였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산걸음에 지쳐 있을 것이라는 짐작에서 맛좋은 농주 한 말과 삶은 돼지고기 닷근을 김치와 함께 마을 청년과 처녀들이 지고 이고 내려온 것이다. 감사하는 예절을 지킬 사이도 없이 으적으적 돼지고기를 씹으며 꿀꺽꿀꺽 농주를 사발로 한없이 퍼마셨다. 마을 청년들과 인사를 '땡기고' 나서 또 서둘러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산골짜기에서 바람이 세차게 쏟아져 내려왔다. 그 바람에 하늘의 별들이 우글우글 춤추는 듯했다.
"내가 취했나?"
"별이 춤추다니 내가 분명 취하긴 취했구나!"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상쾌감이었다. 별과 아주 가까이 살고 골짝의 개울물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솔들이 울부짖는 소리, 산속에서 별 이상한 새울음들이 들려와 농촌에 내려오는 옛 전설 속의 도깨비나라로 들어가는 듯했다.
이윽고 마을이 나타나고 박형이 동구에 서서 벌쭉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악수하고자 잡은 손을 그대로 이끌어 개울가에 있는 동생 재두씨의 방으로 들여보냈다. 하하! 그 방 천정에는 삶은 돼지 다리 한짝이 갈고리에 걸려 있고 방바닥에는 김치 뚝배기들 곁에 커다란 양푼 가득 농주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타오르는 커다란 양촛불!
워낙 좋아하는 술들인지라 눈치코치 없이 마셔댔다. 세상에 맛있다는 말은 쉽게 하는 법이 아님을 알았다. 똑 양산박이나 청석골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튿날에야 아버님,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동네 사람들과 또 아침부터 한잔 하는데 이번에는 솥뚜껑만한 시뻘건 영덕대게를 삶아 내놓았다. 아! 도대체 이렇게 먹고 사고 안날까. 걱정할 정도였는데, 사실은 며칠 그렇게 먹고 나서 모두 설사하느라 그동안 먹은 좋은 음식이 다 꺼져 버렸으니 아깝고 또 아까웠다.
흰 두루마기에 검은 통영갓을 쓰고 앞서 걷는 박형과 마을 친구들을 따라 우리는 함을 지고 또 걷고 걸어 강구포구(江口浦口) 안쪽 한 중산간 마을에 도착하였다. 박형 처갓집이었다. 시골 살림으로는 아주 크고 포실한 느낌이고 집도 규모가 큰 초가였다. 사랑은 딴채로 지어져 있었다.
함을 중간에 놓고 흥정하는데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저쪽 상대는 신부의 오빠로 그 지방에서 한다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가 조금 인색하게 굴자 그이 입에서 대뜸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듣자니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청년들이라 카는데, 지금의 농촌 사정을 뻔히 잘 알텐데도 그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농촌에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 점을 미리 생각해 주십시오."
우리 후배들 중 가장 민감하고 제일 약한 것이 김중태 형이었다. 그 말 한마디에 얼굴이 버얼겋게 되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우리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그만 놓자! 그만 놓자고!" 그렇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먹자판인데 최혜성 형과 내가 너무 취한 끝에 옆방에 걸어 놓은 시골 양반들 갓을 끌어다 쓰고 장난을 하는 등 난리를 피웠다. 그날 밤에는 박형 처가에서 나온 '이승만'이라는 이름의 친척 청년이 술대접을 하는데 농촌사람 같지 않게 꼬박꼬박 기발하고 영악스러운 대꾸를 해서 술취한 우리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내가 그랬던가, 최형이 그랬던가. 하여튼 우리 중 누군가가
"이승만이 혓바닥을 쑥 뽑아놓겠다, 혀 내놔 봐!"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널름 혓바닥을 내밀었다. 그 혓바닥을 손가락 사이에 쥐고 힘을 쓰니 청년이 온몸을 쏠리며 아파하면서도 잘못했다는 소리 한마디는 기어이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정권 잡을 만하다!"
그날 밤.
달은 휘영청 밝은데 잔뜩 취한 나와 최형 둘이 마당에 쌓인 기인 대를 하나씩 꼬나들고 신방 창호지 문을 드립다 쑤셔댔다. 방문 안에 세워 놓았던지 병풍 같은 것이 안으로 펑 하고 쓰러지며 박형이 문을 박차고 뛰어 나왔다.
"늬들! 정 이럴래?"
"아이쿠!"
둘은 정신이 펄쩍 들어 도망해 버렸다.
이때의 사건을 두고 박형 부인은 가끔 왈,
"그때 그 장난을 해서 득남(得男)을 못하고 계집애만 다섯 아닌가요!"
하기는 박형은 딸만 다섯이다. 어찌됐든 미안하고 또 미안한 일이었다. 강구(江口) 포구에서 박형 친구 수광씨와 또 마시고, 떠나는 날은 영덕경찰서에서 정보과장이 나와 우리를 대접했다.
그 술집.
꼭 꿈결에 본 듯한 고즈넉한 술집! 큰 마당 뒷곁에 대밭이 있고 그 대밭 너머에 산을 오르는 조용한 산길이 있는데, 웬일인지 내게는 6·25를 전후해서 빨치산들 활동하던 풍경 같은 느낌이 강하게 왔었다. 기괴한 학살현장은 아닐까. 역사와 자연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사단은 거기서도 났다. 상부에서 지시하는 일이라 우리를 대접하기는 하지만 신명이 날 리 없고, 가진 현금도 없어서였던지 정보과장은 외상을 긋자느니 주인 아주머니는 안된다느니 한참 굿을 벌이는데 정보과장이 공무원에게 감히 비협조적이라고 호통을 치며 주인 뺨을 치고 또 거기에 흥분한 김도현 형이 정보과장에게 호통을 치는 소란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김중태 형과 포항에 와서 하루를 자고 그 이튿날 서울로 돌아왔다. 가는 길이었던가, 오는 길이었던가. 그 무렵 경북 안동 시내에 있는 김도현 형의 집에 잠시 들러 김형(金兄)의 큰형님이 주시는 제비원 도가의 옛날 소주 마시던 일을 잊을 수 없다.
그 진짜배기 독한 소주를 목에 탁 털어 넣으니 뱃속에서 갑자기 뜨거운 불이 확 솟아 오르면서 코 끝에 이상한 향기가 휘익 하고 감돌았다. 그래서 그때 내가 한마디 이용악(李庸岳)의 시구를 읊었더랬다.
"불타는 술잔에 꽃향기 그윽한데…."
시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옛술, 우리의 옛날에는 소주마저 예술이요, 풍류였다. 이것이 다만 복고주의일 뿐인가. 아니면 원시반본(原始返本), 서양말로 르네상스, 범부(凡父) 선생의 용어대로 '동방 (東方) 르네상스'를 향한 정서적 회귀인가.
우리술처럼 우리의 고유 사상 안에는 애당초부터 세계성, 우주성이 들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생명·평화·극단 사이의 조화, 이렇게 세가지 원리요, 사상이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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