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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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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7>

김기팔(金起八)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되어 가족 외에 처음 만난 것은 아마 김기팔 형일 것이다. 술자리였는데 최불암 형도 함께했는지 모르겠다. 아주 가까운, 그리고 오래 된 술친구들이니까.

명색은 나를 위로한다는 술자리, 그러나 김기팔 형 표현대로 '러시안 제스처'였다. 러시안 제스처란 친구들끼리의 술자리에서 한 사람이 어떤 궁한 친구 하나를 동정하는 얘기를 꺼내면 다른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그를 돕는 방법과 거기에 대한 자기 몫에 대해 한없이 부풀리며 착한 척 방정을 떤다. 그러나 그것은 술안주일 뿐이고 이튿날은 까맣게 망각, 이제 또 다른 사람 걱정을 시작하는 러시아인들의 술버릇을 말한다.

왜냐하면 김기팔 형은 술자리 내내
"야! 빨갱이!술 먹어! 이 빨갱이야!"

그러나 나는 화를 내는 대신 픽픽 웃기만 한다. 왜냐하면 그의 본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공연히 그래 보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날은 전주(前酒)에 잔뜩 취한 최불암 형이 나더러 정색을 하고 꼭 연기하듯 심각하게 "영웅! 영웅!"하고 치켜세웠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이다.

하긴 영웅은 무슨 얼어죽을 영웅인가! 술고픈 한낱 거지일 뿐! 첫 회에 이미 잔뜩 취하고 두번째를 가고 또 세번째를 가는데 김기팔 형 말대로라면 이것이 모두 감옥에서 고생한 김아무개를 위로하기 위한 술자리란다. 그러나 속내는 술마시고 취하자는 목적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갱이! 빨갱이!'하는 냉전적(冷戰的) 호칭(呼稱) 속에 김형 나름의 숨은 아픔과 우정이 배어 있음을 모를 만큼 멍청한 나도 아니요, 또 그리 짧은 인연도 아니었으니 술자리는 통금이 넘어 아예 정릉에 있는 김형의 방으로까지 연장되었다.

놀라운 일이 그 방에서 벌어졌다. 김기팔 형이 눈물바람을 한 것이다.
"야! 이 빨갱이! 이젠 다시 감옥에 가지마! 엉! 이 빨갱이야!"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그러나 이 모두가 그저 주책일 뿐일까.

김형이 별세하기 직전, 해남으로 낙향한 나를 보러, 생활 때문에 난초 장사 나선 연극 연출가 박정기(朴精機) 형과 함께 해남 남동집에 와 밤새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며칠간 대흥사(大興寺)며 초의(草衣) 스님의 일지암(一枝菴)이며 강진(康津) 다산초당(茶山草堂)과 땅끝을 구경하고 나서 돌아가고자 작별을 고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나더러

"죽지마, 임마! 죽지마! 꼭 살아야 돼! 오래오래 살아서 옛말 하자. 응! 지금 죽으면 너무 억울하다, 너무 억울해! 죽지마! 죽지마!"

꼭 어린애 같았다. 그러나 그 직후 내가 큰 병에 걸린 걸 보면 그이가 이미 무슨 예감을 한 것 아닐까. 그런데 죽을 것 같던 나는 살고, 죽지 말라던 그이가 그 직후 의료사고로 별세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너무나 억울하고, 너무나 허망하다.

그의 이런 인간성은 그의 드라마 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가슴을 울컥 하게 하는 인간적 아름다움이 작품 밑에 도도히 흐르는 것이다. 왜 가는가. 왜 정든 사람들은 일찍 가서 남은 자들을 서럽게 만드는가. 참으로 인생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고등학교 2학년때 만나 대학 시대 내내 함께 연극을 하고 함께 마시고 함께 뒹굴던 그이가 보고 싶을 때가 많다. 요즈음도 외로울 때면 '기팔형'하고 입속으로 불러본다. 그러면 어디선가 허공에서 덧니를 드러내고 킬킬 웃으며 평안도 사투리로

"왜 그래? 이 빨갱이야!"할 것 같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말한 사람 역시 중앙학교 출신이었다. 참으로 오늘 이 글을 쓰며 그리운 형을 그리워한다. 이미 끊은 지 10년이 넘은 술이지만 오늘은 어느 허름한 목로에 혼자 앉아 기팔 형을 추억하며 조금만 마시고 싶다. 형수는 어찌 사는지, 아이들은 이제 다 시집을 갔는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은지…. 한번도 못 찾는 내가 죽일 놈이라는 생각만, 생각만 들 뿐이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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