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6>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6>

첫미소

나의 첫 감옥 체험을 형상화한 네 편의 시를 따라가며 기억을 정리한다.

노을녘, 수리떼 떠도는
초여름의 옛 戰場에 돌아왔다.

한자루의 보습을 메고
흙 속에 묻히고 이미 바람에
흩어지고 수리의 밥이 되고
뜻모를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러나
아직도 날카롭게 희게 빛나는 뼈들처럼 거친 더운 숨결이
살아있고

어디서 들개가 짖는다
거친 숨결이 흙을 생동시킨다
이 사멸하면서 살아나는 대지에
보습을 박는다 발을 대고 누른다

아아 부드러운 이 살의 탄력이여
살아 있는 흙들이
꿈틀거린다

나는
전신의 힘을
보습에 모은다.

'서대문(西大門) 101번지(番地)'라는 시다. 이어서 혼자서는 활동도 못하고 반드시 교도관이 곁에서 지키는 감방의 삶에 대한 시가 있다. '삼천리 독보권'(三千里 獨步權)이다.

떨어져라 개비야
부디 떨어져라 미칠 나의 원수야
저 세상까지도 귀신되어 붙어다닐
쎄리야 짜부야 개비야 떨어져라

태도 끊었다 떨어져라
고향도 인연 미련 모두 끊고
제어미 독불이다.

오살것
三千里를 혼자 굶고 헐벗고 벌판에 자고
제멋대로 돌아칠란다 떨어져라.

개비야 부디 떨어져라
꿈속에도 숨어
너는 나의 夢精까지도 엿본다
자면서도 너는 나를 지키고
네 마누라를 주무르면서도 너는 나를 근심한다

손톱에 묻은 똥을 너는 담뱃진이라
우겨 나를 친다
네 상전이 훔친 것을
훔친 죄, 네 상전의 털난 꼬리를 보고
웃은 죄, 네 상전의 상전이 원숭이라고
말한 죄, 네 상전의 어머니가 내 첫사랑이라고
쌍말한 죄, 네 상전의
하도 아니꼬워 네 상전이라고 바로
말한 죄밖엔
아무 죄도 없다 떨어져라
부디 부디 떨어져라

죽어도 못 떨어지면
에잇 달라붙어라 찰싹

오오 내 징그럽게도 사랑스런 개비야 가자
쎄리야 짜부야
지옥으로 같이 가자
칼산지옥 불산지옥
송곳지옥 모기지옥
펄펄 끓는 유황지옥으로 개비야 가자
어서 가자

부디
오오 내 징그럽게도 사랑스런 개비야
부디 떨어져라
三千里 獨步權을 나에게 다오.

'개비'란 '마개비' 즉 병 '마개'를 뜻하니 감옥의 교도관을 말하고 '삼천리 독보권'(三千里 獨步權)이란 감옥 용어로 교도관의 감시 없이 혼자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나는 김중태 형 등에 비하면 중죄인이 아니어서 일반 잡범과 합방(合房)했다. 한 여름철이었다. 그때의 체험을 '여름 감방에서'로 시화(詩化)했다.

따통꾼 安씨는 만주서 왔다.
전과 이십범 마적대 출신
별명이 갈쿠리인 安씨는 곧잘 마적들의
붉은 술이 달린 短刀며 노을진 평원의
말달리기며
마을을 통째로 들어먹고 중국년을
한꺼번에 셋씩이나 상관했다는
옛 이야길 하다간 노상
인간은 모두 도둑놈이라고
험상궂게 악을 쓰며 침을 뱉는다.

그렇지 않다고
착한 사람 얘길 하단 벽력이 떨어진다
너두 도둑 정권도둑
그러나 未遂다 헤헤헤
나는 껄껄껄 웃고 만다

그런 날 밤엔 安씨와
뼉절을 하며 나는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고 칼을 던지고
나는 흉악하고 흉악한 마적이 된다

중국년을 셋씩이나 상관하고
마을에 불을 놓는다
싸그리 통째로 들어먹는다

뿌우연 호박꽃을 쳐다보며
인간은 모두 다 도둑놈이라고
밤새워 중얼중얼거리며.

따통꾼은 아편중독자를 말한다. 김민기(金敏基)의 노래 '아침이슬' 속의 '나는 미소를 배운다'는 구절에 다음의 시상(詩想)이 연결된다. '첫 미소'다.

잠에서 깨어
이슬속 가득찬 외침으로 깨어
새벽길 빛나던 하아얀 풀들
쓰러져 갔네
쓰러져 갔네
내 발길 아래
등 뒤로 아득히 잊혀져 갔네

가슴에는 뉘우침
천근을 메고 달아났었네
허덕이며 숱한 산굽이 돌아 허덕이며
저 외침 저 머나먼 도시
끝끝내는 핏발선 벗들의 저
눈동자속
매질 속으로
녹슨 철창속
저 허전한 자유 속으로
다시 새벽이 오고
더운 이마에 이슬 내릴 때
아아 그러나 일어서고 있었네
내 발길 아래
등 뒤로 아득히 잊혀져간 풀들
일어서 여름대지의
혼인듯 새하얗게 타고 있었네
비탈도 골짜기도 산등성이도 모두 일어서
함성인듯 불길인듯 미쳐 일어서

나는 그때 처음으로 미소를 배웠고
나는 그때 처음으로 역사를 알았네
스물세살 나던 해 뜨거운 여름
퍽도 어리숙한 시절이었네.

그랬었다.
스물세살.
그때 처음으로 역사의 엄중성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와는 반대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로 돌아가는 민중의 삶, 그 내면적 카오스의 생성의 시간을 나는 이미 생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고독의 근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아는 만큼 나는 참여하기 시작했고 만신창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접견 대기실에서 뭐라고 따따부따하는 교도관에게 현승일 형이
"이래봬도 대통령과 싸우던 몸이야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을 때의 나의 놀람은 무엇일까.
그는 당차고 힘찬 사람, 앞으로 정치할 사람이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일까.

나는 애당초 정치나 권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이것이 이 순간 분명해졌으니 바로 그 놀람 때문이었다. 접견가다 보니 건너편 옥사 독방에 벗 하일민 형이 철창을 붙들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인혁당'(人革黨), 아니 이건 '불꽃회' 관계일 것이다. 내가 그에게 우정을 표시할 수 있는 것은 미소뿐이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미소로만 그치지 않고 커다란 홍소(洪笑)로 변할 수도 있었으니, 그 안에서 푸른옷을 입은 조형을 만났을 때였다.

조형은 대뜸 가라사대
"감방의 변기통 앞에 세워둔 나무 가림판 있지! 거기에 한자로 '길가정인'(吉佳貞仁)이라고 써 있지! 그거 누구 글씨인 줄 알아?"
"모르겠는 걸…."
"추사(秋史)야, 추사!
완당(阮堂)이야, 완당!
우하하하하!"

그래.
그랬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