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5>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5>

계엄령

'계엄령'이라는 알베르 카뮈의 작품이 있다. 다 읽고 난 느낌은 '상황'이 주인공이라는 것. 그것이 지나쳐, 하긴 지나칠 만도 하지만, 종교의 신(神) 대신 실존적인 신(神), 즉 '신적(神的)인 것'이 되었다는 나의 독후감이다.

그날 오후,
방송반의 후배 참모들, 박삼옥 형 그룹의 판단, 농성장 뒤에 있는 신축건물 속에서 진행되던 단식농성의 책임자 손정박 형과 학생회장 김덕룡 형 및 여러 학생회 간부들의 판단 그리고 학교 뒤켠에 있는 '새세대' 편집실의 '민비'조직 활동 멤버들의 판단이 서로 어긋나 나도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으나, 각 지역과 서울의 거의 모든 대학생들이 가두 진출을 하고 있어 4·19 수준에 육박한다는 하일민의 제보 등으로 가까스로 판단을 통일할 수 있었다. 판단은 계엄령 가능성이었고 그럴 바에는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5시 조금 전에 우리는 가두 진출과 함께 청와대로 방향을 결정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기력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들것에 싣고 어떤 학생은 링거를 꽂은 채 의대생들이 호위하면서 가두 진출을 하기 시작했다. 내 주위에는 성능 좋은 라디오들이 서너 대나 집결해 있었다. 우리가 가두로 나서면서부터 동아방송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 현장스케치는 끔찍했다. 뭔가 흉흉하고 불측한 느낌까지 풍겼다. 종로5가를 돌아 파고다공원 앞을 지날 때 동아방송은

"학생 시위대는 지금 막 파고다공원을 통과했습니다. 청와대로! 청와대로! 일보 또 일보!"
똑 북쪽방송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화신앞 십자로에서 하일민 형이 제보했다.

"청와대로 방향을 잡은 것을 확인하고 즉각 오늘밤 계엄령을 선포하기로 결정했단다. 청와대 부근까지 진출했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학교로 후퇴하는게 좋겠다. 또 상황을 알려줄게!"

광화문 입구 동아일보 앞에서 다시 대오를 정비했다. 맨 앞에 거대한 태극기를 열명 가까운 학생들이 붙들었고, 바로 그 뒤에 박삼옥 그룹과 내가 어깨동무하여 열짓고 그 뒤를 문리대 검도반원들이 따랐다. 중앙청 바로 뒤에 솟은 백악(白岳)과 먼 곳 보현봉(普賢峰)의 푸른 모습이 일본 제국주의 조선 침략의 지휘부였던 중앙청의 흰 대리석 건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음을 새삼스레 느끼며 정문을 돌아 해무청(海務廳) 앞에서 정지했다. 청와대 입구 방향에 군 트럭들, 큰 판자를 붙여 저지막을 형성한 군 트럭들을 뒤로 돌려 열지어 놓았다. 그 주변에 방독면을 쓴 비정한 기계와 흡사한 군인들이 삼엄하게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바로 그 앞에서 연좌에 들어갔다. 일어서서 앞으로의 행동에 관해 방향을 말하던 내가 갑자기 쓰러져 실신해 버렸다. 서울대 의대 앰뷸런스에 실려 급히 의과대학 응급실로 향했다. 거기서 응급조치를 받고 난 나는 끝내 고집을 세워 앰뷸런스로 다시 해무청앞 연좌시위대로 돌아왔다.

격려의 박수 속에서 마이크를 잡고 꽉 쉬어버린 목소리로 단 한마디만 되풀이 되풀이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죽읍시다. 어떤 경우에도 자리를 뜨지 맙시다. 우리의 각오에 따라 상황은 결판날 것입니다."

아마 서너번 되풀이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쉰 음성은 가까스로 동료들에게 전달되었다. 또 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찬성의 표시였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하일민 형이 다시 왔다.
"지금 곧 진압이 시작된다!"

일민 형의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최루탄이 머리위에 우박처럼 쏟아졌다. 눈을 가린 채 나는
"움직이지 마시오!"

소리 지르고 나서 눈에서 손을 떼어 보니 이미 군중은 모조리 일어나 중앙청 정문쪽으로 뛰어 달아나고 있었다. 텅빈 해무청앞 아스팔트에 우박같이, 우박같이 최루탄만 최루탄만 쏟아지고 또 쏟아졌다.

나 역시 중앙청 앞으로 뛰어가 대오를 다시 정리하고는 방향을 동숭동으로 바꿔 잡았다. 행진하면서 '민주학생의 노래'와 '해방의 노래' 등을 선창하게 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고 중앙청 건물로 불방망이와 수없이 많은 돌과 화염병들이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민 형이 또 왔다.
"흩어지면 안돼!
폭동은 반대!
문리대로 돌아가 다시 정리해!"

구두닦이인지 신문팔이인지 조폭(組暴)인지 '홀로주먹'인지 알 수 없는 한 청년이 내게 가까이 와 마구 덤비며 겁을 주었다.
"비겁한 새끼들! 대학생놈들은 할 수 없어! 중앙청을 습격하자고! 불질러 버리고 경찰서를 모두 때려 부숴! 부숴 버려. 이 새끼들아!"

내 마음이 도리어 차분해졌다.
나는 이번 이 운동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4·19가 아니다. 희생을 줄여야 하고 폭력을 배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운동은 계속되어야 할 장기적인 민족운동이요, 반(反)파쇼 민중운동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앞에서 대오의 방향을 꺾을 때 일민 형의 제보가 또 있었다.
"군(軍)이 진주했다.
계엄령이 소급선포될 것이다.
빨리 돌아가 정리하는 게 좋겠다."

나는 대오의 걸음을 재촉하며 거리의 불빛들, 4·19때와 달리 구경만 하는 시민들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계엄령!

상황이라는 실존적 조건이 신(神)이었다.
지금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집단이건 개인이건 인간적 의지나 신념이 아니라 계엄이라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주인공이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인지 동숭동으로 돌아가면서 내내 생각했다. 무엇인가 굴욕감이 꿈틀거리는가 하면 반대편에 유리(푶里)의 감옥에 갇혀 온갖 위협과 핍박에 어금니를 악물고 하늘의 뜻에 따르려 한 주 문왕(周文王)의 비폭력적 태도와 그 인후(忍厚)의 자세가 환영처럼 흰 사막의 외로운 검은 점 하나와 같은 기이한 환영처럼 스쳐 지나고 있었다.

문리대 단식농성장에 도착한 우리는 즉시 둘씩 둘씩 짝을 지었고 마이크는 그들에게 빨리 학교를 빠져 나가라고 일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쉰 음성으로 마이크를 통해 작별인사를 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장기적인 싸움이 시작됩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나는 박삼옥 형의 걱정에 따라 그들에게 뒷정리를 넘기고 운동장 스타디움 끝에 있는 야구펜스의 철망을 넘어 피신했다. 미아리 집에 들렀다 그 이튿날 바로 원주로 내려갔다.

짐을 챙겨 어딘가 강가에 가서 텐트를 치고 장기적인 캠핑을 하려는 계획이었는데 내가 떠나기로 한 그 이튿날 이른 아침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동대문경찰서로 끌려간 나는 나의 혐의를 연신 부인했으나 수도 없이 쏟아지는 나의 현장사진들 때문에 아무 소리 못하고 기소되어 서대문구치소로 넘겨졌다.

첫 감옥 체험이었으니 내 나이 스물셋이었다. 상황이 사람보다 더 드센 주인공이라는 기이할 만큼 비극적인 패배의식을 안은 채 나는 감방으로 들어갔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