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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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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3>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5월20일이었다.

당시 박정희와 김종필이 내건 정치이념이란 허명(虛名)은 '민족적 민주주의'란 것이었다. 우리가 지향하는 민중 주체의 민족주의, 민중민족혁명의 이념을 도용(盜用)한 것이 분명했다. 말인즉슨 유럽이나 미국식 민주주의는 민도(民度)가 낮아 아직 이르니 한국의 낙후한 실정에 알맞은 일종의 '군부에 의한 교도민주주의'가 불가피(不可避)하다는 것이겠는데, 실은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었던 것이다.

우선 우리의 지향과의 변별성이 강조돼야 할 필요가 제기되어 이 이념의 허구성을 먼저 강력하게 폭로비판하고 그 이름 밑에 저질러지는 대일굴욕외교(對日屈辱外交)와 매판자본(買辦資本)의 도입(導入) 등을 매장하는 장례식 형태의 집회와 시위가 바로 '5·20' 행사였다.

그 장례식 조사(弔辭)를 내가 쓰고, 그 책임과 발표와 낭독 등은 정치학과의 똘똘이 송철원이 맡았다. 송철원 형은 본디 경기고 출신의 서울 토박이에 장안 깍쟁이인데 당시 중앙정보부의 비밀 학생프락치 조직이었던 'Y.T.P' 즉 '청년사상연구회'(靑年思想硏究會)의 정체를 폭로해 세간(世間)을 놀라게 하고 곧 정보부에 붙들려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담뱃불로 마구 지지는 등의 고문을 받고 나와 또 다시 그 사실을 언론에 폭로한, 말하자면 정보부가 혀를 내두를 정도의 독종 중의 독종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조사(弔辭)'는 그리 잘 쓴 명문(名文)은 못되었다. 그러나 처음 쓰는 문장(文章)이라서 도리어 '투'가 없고 산뜻한 '풍자미'가 곁들여져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박정권을 아예 초장부터 시체요, 썩어가는 송장으로 단정하여 일단 죽이고 들어갔으니, 이 노골성이 그들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한다. 나중에 들으니 박정권의 고위층까지도 '이런 죽일 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진 송철원 형은 피신해 체포가 안 되었으니 내게는 그리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

그날 민족적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커다란 검은 관(棺)을 맨 앞으로 한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이화동과 혜화동 두 방향에서 강한 진압이 들어오고 최루탄이 발사되었다. 교내로 쫓겨들어온 학생들은 아마 데모 시작 이후 처음으로 돌을 던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대규모 시위였다.

언론은 쿠데타 이후 민주세력의 최대의 반격으로 표현했다. 서울과 각 도시의 대학들이 데모를 시작했다.

"반동이 오면 또 싸워야지!"
4·19날 조풍삼 형의 말이었다. 그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되고 있었다.

그날 저녁과 이튿날 오전까지 밤을 새우며 나는 송철원의 집에서 손정박·박영호·박지동 형과 모임을 가졌다. 제일선 리더십이었던 3인조(三人組), 김중태·김도현·현승일 형이 동국대(東國大)의 장장순 형 등과 함께 전국에 현상수배되어 몸을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제이선의 리더십이 일선으로 나오면서 구축되고 있었다.

우리는 장기적인 연좌단식농성(連坐斷食籠城) '시위'(示威)를 계획했다. 장소는 문리대 캠퍼스의 4·19 학생혁명기념탑 아래였고 시일은 아마도 5월25일경부터였던 것 같다.

이번에는 김덕룡(金德龍) 형의 문리대 학생회를 끌어들이기로 하고 총책임을 손정박이 맡았다. 나는 농성시 가장 중요하다는 '방송선전반'을 맡았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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