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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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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2>

최루탄 문학

원주에서 나는 매일 밤, 매일 낮 바로 그 선교사 '이발소의 땅'으로 갔다.
가서 속으로 서투르나마 기도했다.
조국과 나를 위해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조동일 형에게서 원주로 소식이 왔다. 상경(上京)하라는 거였다. 반가워 쏜살같이 올라왔더니 대학가는 거의 매일 데모였다. 진압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본을 경계하는 민족적인 우국충정을 이해한다고 떠벌였던 박정희가 점점 야박하고 겁주는 소리를 해대고 야당과 언론은 거의 매일 학생데모를 지지하며 정부를 비판 공격했다.

대학로와 종로5가 등지에서는 또한 거의 매일 최루탄이 터졌다. 재채기와 눈물의 바다였다.
조형 왈,

"최루탄 어떻게 생각해?"
"처음 쓰는 것 아닌가. 미8군이 공급한다면서?"

"그래! 그러나 국내에서도 생산 채비를 한다는군!"
"그래서?"

"최루탄문학회! 어때?"
"최루탄문학회?"

"응! 그 이름으로 풍자시, 정치시들을 여럿 써서 시화전을 해보자고 불렀어!"
"…."

"왜 그래?"
"좋긴 좋은데…."

"하자고! 왜 자네 요즘 소극적인가?"
"…."

"자! 내가 스타트를 끊을 테니 하자고! 을지로 5가에 우리 술집 연 것 알지? 거기 홀에다 전시하면 좋을 거야, 매스컴에 알리면 사람들이 구경올 것이고. 그럼 술장사도 잘 되고 허헛!"

그날 저녁부터 일은 시작되었다.
술집 안방에서 조형과 나는 시화(詩畵)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술을 마셔가면서 농담하면서 한켠으로 시를 쓰고 다른 한켠으로는 그림을 그렸다. 조형과 나는 자기 이름으로도 여러 편을 쓰고 여러 그림을 그렸지만 또 없는 사람의 가명(假名)을 만들어 공격적인 풍자시들을 다량으로 '제작'했다. 그 이름들이 모두 괴상했다. '마달수' '김미친' '송절편' 등 모두 이따위였으나, 하긴 우리만 그런 건 아니었다. 한창 데모대 체포가 시작된 뒤 경찰서에 붙들려간 학생들 이름이 신문에 주욱 나오는데

'고려대 외교학과 양재기'
'건국대 행정학과 주전자'

이런 식이었다. 아마 그때만 해도 학생이나 경찰이나 속으로는 군부정권을 비웃는 심경이 같았던 것 아닌가 한다. 아니면 '김미친'이 어찌 신문 문화란에 통하며 '양재기' '주전자'가 어떻게 경찰 조서와 사회면 신문기사가 되겠는가.

지금 생각나는 작품은 조동일 형의 '일월산(日月山)'이란 시와 '신돌석(申乭石)'이란 시다. 좋은 작품이었다. 조형은 글도 잘 썼지만 그림도 잘 그렸다. 더욱이 잊히지 않는 것은 두 사람. 독문학과 안삼환(安三煥)씨의 두 작품 '최루탄탄(催淚彈彈) 대로변에 할머니가 울고 있네'라는 최루탄시(催淚彈詩)와 '청재비'라는 극채색(極彩色)의 아름다운 민요시 한 편이었고 또 한 사람, 하길종(河吉鍾) 형의 '태(胎)를 위(爲)한 과거분사(過去分詞)'라는 다분히 난해한 슈르적인 시였다.

최루탄문학회의 시화전 직전에 문리대 도서관 밑 숲속 나무가지에 걸었던 교내 시화전에서도 하길종은 시어(詩語)와 부서진 거울 조각들을 번갈아가며 이어 붙여 기괴한 시연(詩聯)을 만들어 내는 초현실주의 실험도 했었다.

최루탄시화전이 신문에 인기리에 게재되었다. 많은 사람이 보러 왔는데 그 오프닝에서는 시낭송회를 열었다. 그때 불문과에 다니는 한 샹송 잘하던 친구가 샹송을 불렀는데 그때 그가 가정교사하던 집의 주인인 라디오 드라마 작가 한운사(韓雲史) 선생이 구경왔던 것이 기억에 선명히 남는다.

왜냐하면 그 무렵 한운사(韓雲史) 선생은 라디오에서 '가슴을 펴라' 혹은 '대학가의 건달들'이라는 학생 주인공의 청춘드라마를 준비하며 샹송하는 불문과 친구를 통해 나, 송철원 형 등 몇 사람을 성북동 자기 집에 초대해 드라마의 뼈대 짓는 일에 도움말을 원했고 나더러는 목소리가 바리톤이어서 느낌이 좋다며 현지 대학생 출연을 부탁해 왔었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팔자에 없는 성우(聲優)가 될 뻔했다. 방송국까지 갔다 거기서 만난 김기팔(金起八) 형의 강한 만류로 그만두었으니…. 내가 잠깐 최창봉 선생의 충고를 잊고 있었음을 방송국에서 학교로 돌아오면서 기억해 내고 참으로 크게 안도했다.

나는 역시 개인예술가였다.
그 무렵 나는 시화전 등을 통해 자신감(自信感)을 회복하고 약물로 병을 치료하여 차차 송철원(宋哲元)·박지동·손정박·김도현 형 등 직접 행동 역량들과도 만나 여러 가지를 의논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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