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夭絶)한 영화감독 하길종(河吉鍾)을 기억할 것이다.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도미(渡美)하여 UCLA에서 '대부(代父)'의 프란시스 코폴라와 함께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하길종을 기억하는 사람도 아직은 많을 것이다.
그의 '화분(花粉)', '한네의 승천', '병태와 영자'등은 현대 한국영화의 큰 두 갈래, 즉 신세대의 청바지 모더니즘과 민족적 정서의 아픈 기억 사이에서 고민한 당시 한국 영화의 기념비이기 때문이다.
그 하길종과의 이야기다.
그는 나와 고등학교때 한 반 친구다.
그래서 가깝고 더욱이 앉으면 뿌리를 뽑고야 마는 술친구다.
그가 졸업하기 전이니까 아직 미국행이나 영화계 한참 전의 이야기다.
나는 그해 봄,
1964년 봄,
김중태(金重泰), 김도현(金道鉉), 현승일(玄勝一) 등이 '3·24 제국주의자 화형식'을 전개하던 그 봄날 전후 무렵 어느 날, 중동고등학교 동창들의 아유회가 있던 날이다.
세검정(洗劍亭) 밖으로 놀러 갔다가 술이 잔뜩 취해 뿔뿔이 흩어져 돌아오는 뻐스에 그와 내가 함께 탔다. 술김에 둘이서 합의한 것이 낙원동에 가서 술을 더 먹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돈이 땡전 한 닢 없었다. 그러나 길종은 제 바지주머니에서 미군 군표(軍票, 달러 대체표)를 반쯤 꺼내 살짝 보이며 자랑했다. 홀딱해버린 나는 헤헤거리며 길종을 따라 소위 '나이아가라'라고 불리우던 낙원동 바가지 유흥가를 함께 어깨동무하고 신바람나게 들이 닥쳤다. 종로 2가, 3가의 하꼬방집들이었는데 이층까지 있었다. 우리는 삐꺽대는 사다리를 타고 천장이 낮은 이층방으로 올라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12시가 넘었다.
통금(通禁)이 있을 때다.
그런데 길종이 미군 군표(美軍 軍票)를 꺼내 흔들어대며 술과 안주를 접대부 여자들에게 직접 가져오라고 밑으로 내려보낸 뒤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천장을 살피더니 천장에서 밖으로 뚫린 조그마한 출구를 하나 발견하고는 날더러 튀자고 한다.
'왜?'
'나 돈 없어.'
'아까 군표(軍票)는 …?'
'그거 시효(時效)가 넘은거야 튀자!'
얼떨결에 일어나 길종이 먼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지붕으로 무사히 나갔는데 그 뒤를 따라 사다리로 오르던 내 다리를 밑에서 두 여자들이 붙들고 저희 몸을 뒤로 제켜버렸다. 나는 여자들과 한덩어리가 되어 쿵쾅하며 방바닥으로 굴러 떨러졌다. 떨어지자마자 여자들과 아래층에서 올라온 '요짐보(用心棒, 술집을 지키는 주먹)'에게 여기저기 한참동안 된통 얻어터져서 코피가 나고 입술이 찢어진 채로 뻗어 버렸다.
출구 밖으로 해서 지붕에 올라간 길종이
"영일아! 영일아-!"
부르며 땅으로 훌쩍 내리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바람처럼 달아나버렸다.
돈이 될 만한 가죽잠바는 요짐보가 이미 잽싸게 벗겨가고 홑셔츠 바람에 피투성이로 나 혼자 남았다.
두 여자가 좌우에서 나를 지켰다.
밤새 그랬다.
새벽녘에 완전히 술에서 깨어난 내 피투성이 얼굴을 보며 둘중 전라도 가시내가 말했다.
"우리도 할 수 없었당께! 우리 원망 마쑈 잉-! 할수 없제잉-!"
몹시도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다른 한 여자는 아예 눈을 내리감고 졸고 있었다. 전라도 가시내가 또 말한다.
"으디요? 고향이 으디여라우?"
"나도 전라도요. 목포요 목포!"
"오메, 목포라우! 나는 영암인디!"
"엇! 그럼 가깝네"
"정말 가깝구만이라우 잉-!"
정말로 반가워하는 얼굴이다.
얼굴에 다정스러운 애교가 돌아왔다.
이 얘기 저 얘기, 해뜰 때만 기다리며 주고 받는데, 그 여자는 내내 내 얼굴을 보며 찢어진 피투성이 상판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내가 으뜨케 해줬으면 좋겄소?"
"………"
잠에 골아 떨어져 아예 새우처럼 구부리고 있는 자기 동료를 흘긋흘긋 보면서 나를 짙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다는 소리가
"나……해도 좋은디……나 그것 밖에 없응께……그란디 쬐꼼 안 좋아서……"
"뭣이?"
"아니어라우? 그란디 어쩐당가? 자꾸만 마음이 가는디……그녘한테……먼 일까잉-? 고향 친구도 같고 동네 오빠도 같고……내가 쬐끔 안 좋은디……으짜면 좋으까?"
느낌이 왔다.
좋아한다는 얘기다.
낯선 타향에서 그래도 고향사람 만났다고……쩟쩟, 팔짜도…….
결국 날이 훤히 샐 무렵 둘이 그냥 얽혀버렸다. 여자가 위로 먼저 올라가 포개져서 씨근덕거리다 동료에게 들켜버렸다. 사나운 눈매로 우리 둘을 쏘아보는 여자더러 내가
"내가 어떡하면 좋을까?"
경기도 말씨의 그 여자 가로되
"도망친 사람이 딸라 갖고 있었죠?"
"그래"
"그 사람 찾아갑시다. 가만보니 댁은 땡전 무일푼인 모양이니까! 우리 둘이 책임져야 돼요. 그러니까 그 사람 만나러 같이 갑시다. 일어나요!"
아침 첫 햇살을 받으며 눈을 찡그린 채 둥숭동 문리대까지 셋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영암 여자가 그래도 정을 줬답시고 내 곁에 찰싹 붙어서 재잘거렸고 그 동료는 잔뜩 찌푸리고 걸었다.
대학 정문앞에 이르자 둘이 다 깜짝 놀란다.
"오메! 진작 얘기하제-!"
대학생이어서 뜻밖이란 뜻이다.
경기도 여자가 정말 뜻밖의 제안을 했다.
"믿을 만한 사람 같으니까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께요. 빨리 찾아서 돈 받아가지고 오쇼!"
"그라쑈! 그래! 아이고 니 잘 생각했다 야 - 빨리 가보쑈 어서-!"
결국 길종을 잡긴 잡았다.
그러나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도 불문과 여학생들에게 뒷통수를 긁적긁적하며 아쉰 소리해서 돈을 구해왔다. 나도 친구들에게 또 거지짓을 해서 그 일부를 구해왔다.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돈을 내미는 내 손을 그 여자, 그 영암 여자가 두 손으로 꽉 쥐고는 눈물 그렁그렁 하며 잽싸게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훔칠 놀라 있는 나를 뒤로 하고 두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이화동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바보처럼 입을 쩍 벌리고 정리가 잘 안 되는 머리로 그냥 거기 그렇게 서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임질을 앓았다. 성기(性器) 속이 쓰라리고 누런 고름이 흘렀다.
그러나 미움도 후회도 낙망도 없었다.
그냥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것을 감히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욕하는 사람이 없을까? 심한 욕만 안 한다면 난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야말로 '풋사랑!'
벌거벗은 내 생각의
새 뿌리가 자라는 곳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진종일 이마위를
얇은 생각의 삽질만이 스쳐 지나는 자리
가슴의 뜀질마저 나직나직한 자리
아, 고름이 흘러
흘러 놀랄 때 놀라 깨어 외칠 때
나는 이미 옷이었다.
횟대에 걸려 잠든 옷
눈초리는 눈초리대로
신문지는 신문지대로
소매 끝에 앞섶에 바지주름에 기어다니고
걷고 지껄이고
나빈양
펄럭이는 옷
단 한 벌의 깨끗한 눈치빠른 옷
땅거미가 지고
뒷짐을 지고
시뻘건 주둥이를 허옇게 웃는 뒷골목
가자 부산집으로
히히 웃으며 주물렁탕하러 가자
나비들이 살풋 앉을 때
지분냄새 콧가에 설핏 스칠 때
나는 이미 알몸이었다.
주무르고 벗기고 악을 쓰고 빨고 핥고
나는 고름담긴
술 한잔의 고름
시궁창 속 얼굴이
달과 내 오줌에 맞아 깨어질 때
울다 칼부림하다 단 한벌의 옷이 깨끗이
술값에 벗겨질 때
이마 깊이 찬바람이 와서 화살되어 박힐 때
알몸에
알몸에
아아 고름이 흘러
벌거벗은 내 생각의
새 뿌리가 자라는 곳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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